율법이냐 아니면 자유냐?

April 8th, 2018

ICA Sunday Pulpit Message



▶ 제가 오스틴에 이사 온지 얼마 안됐을 때 일이다. 한국 마켓에 물건을 사러 갔었다. 그런데 그 마켓 안에서 건너편에 계신 여성분이 저를 보고 활짝 웃으셨다. 저분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시나 저는 생각했다. 저를 향해서 가까이 오시더니 김태성씨 아닙니까 물어봤다. 자세히 보니까 옛날에 저하고 같이 한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같이 하던 분이셨다. 지금은 같이 우리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잠깐이나마 제가 오해를 한 것이다. 저 여성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나 착각하신 것이다. 이것은 웃으며 지나갈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때는 오해와 착각 때문에 큰 비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 1994년에 스페인에서 열차사고가 크게 났다. 그 당시 열차는 앞과 뒤에 기관차가 달려있었다. 앞에 있는 기관차가 시동을 걸면 앞으로 나아가고 끝에 달려있는 기관차가 시동을 걸면 후진을 한다. 터널을 지나가는 중에 열차가 멈춰 섰다. 전진을 하여 터널을 통과하려고 앞에 있는 기관차가 힘을 내서 기차를 몰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맨 뒤편에 있는 기관사는 후진하라는 신호 인줄 알고 뒤로 가려고 했다. 앞과 뒤가 동시에 가려고 했던 것이다. 앞에 있는 기관사와 끝에 있는 기관사가 서로 소통, 통신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로 줄다리기를 하면서 기차에 발동을 거니까 가스가 많이 일어났다. 기관 열차에 뿜어내는 일산화탄소가 터널에 가득해서 승객 5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앞뒤 기관차의 기관사들이 서로 착각을 한 것이다. 서로 자기의 방향을 가려고 한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오해나 착각이 큰 어려움을 만들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약간의 오해나 착각 때문에 신앙생활을 실패할 수 있다. 그런 부분들을 우리가 정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종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것이 구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거저 받는 선물이 구원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율법인가 아니면 자유인가를 분명히 하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오해, 편견, 착각을 제하면 더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더 열매를 얻는 응답을 받을 수 있다.

 

1. 주인의 요구와 아버지의 바람은 다르다.

▶ 첫번째이다. 주인이 요구와 아버지, 부모님이 바라는 마음과는 확연히 다르다. 주인의 요구는 무엇인가? 자신의 비지니스의 이윤이 많이 남기를 바란다. 그래서 일하는 종업원들로 하여금 손해가 나지않고 이윤이 많이 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요구를 한다. 게으름 피지말고 최선을 다해서 일하기를 요구한다. 주인의 성품이 아무리 착하고 자비로워도 요구를 하고 손해 나지 않기를 바란다. 주인이 직원, 종업원에게 돈을 주는 만큼 일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떤가?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직장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기는 원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마음은 다르다. 일도 중요하지만 몸도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주인에게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도 좋겠지만 자식의 건강을 먼저 생각한다. 자기 자식이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열심히 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일 자체보다는 자식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일하는 종업원이나 자식은 같은 사람이지만 누가 바라보는가에 따라 다르다.

▶ 영적인 세계, 신앙생활도 똑같다.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많이 발전한 것 같지만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 사단이라고 하는 마귀가 이 세상을 혼란 시키고 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행동하는 겉모습에 집중하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속마음보다는 겉으로 드러나오는 행동이 잘했는가 잘못했는가 관심이 더 많고 법에 맞느냐 안 맞느냐에 집중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다. 인간의 잘잘못에 대해서 징계도 하지만 그 영혼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두신다. 부모의 심정을 우리가 안다. 부모는 자식을 보호하길 원하고 자식이 아프면 대신 아파하기를 원한다. 심지어 자식이 죄를 범해서 감옥에 가는 경우에도 대신 가려고 까지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령이다. 죄를 범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다. 그래서 마귀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인간이다. 그런 연약한 인간의 잘잘못보다 그 인간 자체가 먼저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그 영혼이 먼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 영혼이 먼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대신 십자가에서 고통과 치욕을 당하셨다. 왜 인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더 관심을 갖고 있고 더 사랑하는 자가 먼저 다가오게끔 되어있다. 상대를 향하여 더 마음이 애틋한 사람이 먼저 수고하고 먼저 희생하는 법이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로마서 5장 8절에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하기 위함이다. 연약한 우리, 죄를 범한 우리, 원수된 우리를 향하여 먼저 하나님이 오셨다. 대신 감당해 주신 것이다. 주인의 요구와 아비의 바램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고 바라는 것은 바로 이 아비의 심령에 기초해서 바라고 있는 것이다.

 

2. 율법은 죄책감을 일으키고, 복음은 자유를 준다.

▶ 두번째를 보겠다. 율법과 복음은 둘다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율법도 하나님의 것이고 복음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런데 그 두가지에 목적과 방향이 사뭇 다르다. 율법은 무엇인가? 지극히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과 양심같은 기준이다. 그 하나님의 기준과 눈높이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연약한 인간을 심판하면 온전한 인간이 없다. 당연히 인간의 연약함과 인간이 죄인임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율법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완전한 하나님의 기준인 율법을 인간에게 대보면 인간은 그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저절로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이 가진 목적이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율법을 가지고 비추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 율법을 이루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찾아야 하는가? 참된 구원의 길로 이끄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0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완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 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을 이룸으로써 의롭게 될 인간이 없고 율법을 다 지키면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율법 자체가 필요 없다 라던지 나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이 율법은 하나님의 양심과 눈 같기 때문에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합당치 않는 존재가 우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음은 과연 무엇인가? 지극히 선하시고 가장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푼 배려이고 도우심이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을 배려하고 도우시는 방법인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대신 지으신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 먼저 섬겨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먼저 희생해 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가지고 있는 목적이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 복음은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가? 하나님이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셨다. 무조건적인 은혜와 희생을 감수하셨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저절로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그분을 향해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내 인생 문제를 영원히 단번에 끝내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이 이토록 다른 것이다. 사단 마귀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상대방의 잘잘못을 찾아내게 만든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허물과 죄를 보게 되면 주위사람들이 경책하거나 조언을 할 수 있다. 그런 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있다. 그 사람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무너뜨리는 것이 있다. 자살에 이르도록 만드는 것이 있다.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 있다. 인생이 무너지도록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 아니고 율법주의이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자기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그 율법의 잣대를 끝까지 상대방에게 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끝내 주신 것이다. 끝냈다는 증거로 하나님께서 용서의 팔을 완전히 벌린 것이다. 죄에 대한 책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온 저주의 세력에서 우리를 해방 시킨 것이다. 로마서 6장 14절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래서 오늘 본문 로마서 8장 1-2절에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그 책임 마저도 끝내신 것이다. 사람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가책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하루 24시간 일주일 168시간 동안 계속 눌려 있다면 그것은 무언가에 사로 잡혀있는 것이다. 정죄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기억하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셨다. 우리말 성경에는 너희를 해방하였다고 나온다. KJV를 보게 되면 나를 해방했다 라고 바울의 고백을 그대로 기록해 놓았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내가 자유한 것이 중요하다.

▶ 인간은 살면서 세가지 법에 지배를 받는 다고 한다. 물리적 세계에서 볼 때 인간은 중력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물건을 놓으면 밑으로 떨어진다. 높은 빌딩에 올라간다고 하늘로 솟아 오르지 않는다. 발을 공중에 내딛는 순간 그대로 낙하한다. 중력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는 증거이다. 생물학적 세계에서 보면 우리는 생로병사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고 나이가 먹어서 늙어서 죽게 된다는 말이다. 건강한 젊은이가 결국 나이 먹어서 병들어 죽는다는 말이다. 인생에는 4가지의 국면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약을 먹고 운동을 해도 결국에는 나이를 먹는다. 영적 세계에도 법칙에 지배를 받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죄와 사망의 법칙이다. 누구도 사망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죄인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사단 마귀는 죄인인 연약한 인간을 향하여 집요하게 죄와 사망의 법칙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집요하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율법주의로 악용하는 것이다. 너가 잘못을 했으니 책임을 져야 하고 너가 죄를 지었으니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눌리게 만들고 저주 받게 만든다. 운명에 갇혀서 못 빠져 나가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에게 복음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선언하셨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이다. 다 갚았다. 남김없이 다 치루었다. 내 목숨으로 대속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해방되고 자유해라.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신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힘도 부여하신다.

 

3. 이제 우리는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

▶ 세번째이다. 이제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될 이유가 있다.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볼 때 어떻게 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죄까지 속속들이 다 보고 계신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나를 볼 때 어떻게 보겠는가? 처참한 영적 상태를 보신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그리스도 뒤에 숨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볼 때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바울이 쓴 글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말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8장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뜻은 요식행위가 아니다. 내 인생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내 전체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인은 대표하는 분이시다. 내 영혼, 인격, 지정의의 대표로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볼 때에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독생성자를 보실 때 어떻게 보셨는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로다.” 그 그리스도를 보듯 우리를 보고 계신다. 그래서 스바냐 선지자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 더 보셔야 한다. 예수님께서 2000년전에 왔다가 가셨다. 여기에 안 계신다. 예루살렘이나 뉴욕, 워싱턴에도 안 계신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다. 내가 올라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요한복음 14장과 16장에 약속하셨다. 그 성령이 무엇을 한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무엇으로 잉태되었는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예수님께서 무슨 힘으로 공생애 사역을 하셨는가? 물 붓듯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즉, 성령의 권능으로 일하셨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신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 자신을 비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슨 능력으로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는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 그 성령을 마가의 다락방에 보내주신 것이다. 그 성령의 인도를 받고 그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었다. 그 약속을 붙잡는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응답이 왔다. 즉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바로 성령의 힘을 받고 인도를 받는 다는 뜻이다. 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사단 마귀의 방해를 꺾을 수 있다. 영적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 붙잡고 기도할 때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 힘있는 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 정리하겠다. 율법과 복음이다. 율법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전부 죄인이다. 복음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의인이 된다.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마귀는 계속 붙잡고 늘어진다. 계속 정죄를 하는 것이다. 주의 형제자매를 정죄하는 것은 이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에 짓눌리게 만드는 것이다. 복음은 어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끝내셨다. 완전히 끝내셨다. 다 갚아 주셨다. 내가 더이상 갚을 것이 없다. 법적으로 자유 하다는 의미에서 Liberty라는 단어를 썼다. 한국말로는 Freedom도 자유라는 뜻이고 Liberty도 자유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두 단어는 뜻이 조금 다르다. 인간의 원초적인 자유를 Freedom이라고 한다면 Liberty는 법적으로 보장된, 서로 합의된 자유라고 표현한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해방과 자유를 받는 것을 하나님이 법으로 정해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법으로 정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꿈쩍하지 못한다. 이 축복 안에 거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아들로 당당히 서길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하시기를 바란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일하신다. 계속된 정죄감에 눌리게 되면 악한 영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이다. 사단의 함정인 저주에 묵이는 것이다. 운명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가면 갈수록 힘들어진다. 나는 잘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열어 놓으셨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한 것을 아시고 성령의 권능이 동행하신다. 흑암 권세를 깨뜨린 권능으로 함께 하신다. 구원받았지만 아직도 5분뒤의 일을 알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인도를 해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주신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여러분들은 율법 안에 거하시겠는가 아니면 복음 안에 있는 자유에 거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복음의 자유 속으로 부르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축복과 비밀을 찾아 내시기를 바란다.

▶ 기도하겠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려드립니다. 폭군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되셔서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의 작은 오해나 착각, 편견을 내려놓게 하소서. 복음 안에서 치유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자유와 해방을 참되게 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향하여 도전하되 성령의 능력으로 도전하게 하소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미래를 정복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