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아 현장과 가나안 언약

September 30th, 2018

ICA Sunday Pulpit Message



♠ 서론 - 쉽지 않은 결정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 제가 공무원생활을 했던 20대 였다. 그때 말레이시아 밀림에 들어가는 단기선교 리더 생활을 조금 했었다. 휴가 때 마다 그쪽으로 들어가서 구호활동도 하고 복음전파 사역도 했었다. 그 당시에 4개 팀이 있었는데 제가 3팀의 리더였다. 어느 때, 여름 단기선교 훈련을 모여서 하고 곧 출국을 해야 하는데 마침 막내아들 선교가 열병이 나서 병원에 왔다 갔다 했었다. 내가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었다. 제 아내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번 기회는 조금 쉬었으면 하는 바램의 얼굴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 와이프를 돌 같이 여겼기 때문에 물리치고 단기 선교를 갔었다. 그리고는 몇 년이 흘러서 여러 번의 단기선교여행을 통하여 많은 체험을 하고 말씀 사역을 하다 보니까 저를 포함해서 주위의 동료들이 한사람 씩 신학교를 가게 되었다. 은행의 대리였던 1팀 리더가 사직서를 내고 신학교를 갔다. 국세청 공무원이었던 2팀의 리더 역시 한달 후에 사직서를 내고 신학교를 갔다. 한달 뒤에 제가 고민이 되었다. 그때 아주 어린 아이들 3명이 있었을 때인데 이 공무원 일을 그만두면 아이들을 어떻게 먹이고 키워야 하는지 쉽지 않은 결정의 순간이었다. 결국에는 사직서를 내고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30세가 넘어서 미국에 왔다. 달라스에서 부목사로 있었는데 갑자기 담임목사님께서 오스틴에 개척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때는 제가 부목사도 하면서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했었다. 그 덕분에 2층집도 살 수 있었고 아이들을 먹이고 키우며 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마침 그때 저의 큰 딸이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달라스에서 오스틴으로 옮기게 되면 큰아이가 적지않은 피해를 받는 것이었다.

▶ 이렇게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쉽지 않은 결정 순간들이 여러 번 오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믿음의 결정을 할 때가 오곤 한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서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쉽지 않은 결정을 요구할 때가 있다. 이 두꺼운 성경은 전부 그 이야기 밖에 없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데 인간 피조물을 향하여 쉽지 않은 결정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전부 그렇게 했다. 한번도 얼굴을 보지 않았고 데이트를 해보지 않은 남편을 향해서 집을 떠나는 리브가 여인이었다. 램넌트 여러분들은 상대방의 얼굴 한번도 보지 않고 부모님이 결혼하라면 할 수 있는가? 형 에서가 군대를 이끌고 자기에게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도 역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쉽지 않은 결정에 놓여 있었다.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이복형제들을 앞에 만난 요셉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자기가 먹고 마시며 자랐던 애굽의 왕궁을 떠났던 모세,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불러서 여리고 성을 무작정 돌라고 하셨다. 돌에 맞아 죽으면 끝날 수도 있었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다들 지치고 멈추려고 할 때에 아낙산지 앞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45년전에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상기하면서 내가 가겠다 라고 결정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모든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블레셋 군대가 침략하려고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말을 듣지않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적군들이 있는 그 때에 사무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미스바에 모이라고 지시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 때 하나로 모으기가 쉽지가 않다. 주위에는 블레셋 적군들이 있어서 한 곳에 모이게 되면 자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골리앗을 때리고 꺾은 이후에 바로 자신의 장인으로부터 추격을 피해서 도망 다니는 다윗의 생 역시 쉽지가 않았다. 엔게디 동굴에서 잠자고 있는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는데 그것을 내버려둔 것 역시 쉽지가 않았다. 85명도 아닌 850명의 우상숭배자들과 갈멜산에서 홀로 싸운다는 것, 엘리야는 쉽지 않은 결정을 했다. 한번 농사를 지을 때 24마리의 소를 이끌며 했던 거대하게 농업을 했던 엘리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자로 따라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왕이 호출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바벨론의 아하수에로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나갔던 에스더의 결정, 쉽지 않았다. 한두 번 바람 핀 것이 아니라 일심, 전심, 지속으로 바람 피우는 아내를 다시 불러 들여서 감싸 안는 호세아 역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모두가 포로 상태에 있고, 모두가 살기 바쁘고, 모두가 반대하는데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일, 느헤미야는 쉽지 않은 결정을 했다. 구약의 선지자들 전부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신약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돈도 없었고 연약 하였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모든 족속에게 가고, 만민에게 가고, 땅끝까지 가라고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저는 한달에 한번 연합렘넌트데이에 가라고 할 때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가기가 싫었다. 목사들에게 제일 바쁜 날이 토요일이다. 다음 날 주일예배에 있을 메세지 5개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부 쉽지 않은 결정이다. 빌립 전도자는 사마리아 성에서 예수님을 전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어지고 치유되는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사람도 없는 사막 길로 가라고 말씀을 받았다. 복음 받을 에디오피아 내시 한사람을 보고 가라는 것이다. 여러분 같으면 갈 수 있는가? 저 같으면 안 갈 것이다. 교회에는 저에게 잘 대접해주시는 중직자들이 다 계신데 제가 왜 한사람 때문에 가는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간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쉽지 않은 결정, 고백을 하셨다. 수천년 동안 구원받고 축복을 받으라고 언약을 계속 주었는데 인간들은 자꾸 그것을 잃어버렸다. 언약을 잊어버리고 축복을 잃어버렸다. 그런 인간들을 향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것, 쉽지 않은 결정이다.

▶ 성경은 전부 쉽지 않은 결정을 요구하고 수락하는 기록이다. 성경 66권, 총 1089장의 이야기는 전부 이런 이야기이다.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쉽지 않은 결정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성경 인물들이 이런 것들을 통과했다. 오늘 읽었던 성경 본문도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나오라고 하셨다.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유대인들이 애독하는 탈무드에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잘 먹고 잘살았다고 나와있다. 아브라함 집안이 갈대아 사람의 땅인 우르에서 우상을 만드는 장사를 하면서 큰 돈과 권세를 지녔다 라고 탈무드에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 버리고 나오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것이다. 거기서 나오지 않고 아버지 대라의 가업을 이었다고 한다면 큰 권세와 부귀를 누렸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조건과 기득권을 내려놓고 어딘지도 모르는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네가 살던 땅에서 부모와 일가친척을 뒤로하고 내가 너희에게 지시할 땅으로 옮겨가서 살아라. 정말로 쉽지 않은 결정을 요구해서 그런지 아브라함이 쉽게 나오질 못했다. 다 내려놓고 나오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 품고 조금씩만 나오다가 결국에는 형 하란과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줄초상을 2번 당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해서 오늘 본문에 말씀을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을 것이다. 너를 당할 자가 없게 할 것이다. 너의 후손을 통해서 모든 민족을 살릴 것이다. 너무나 위대한 축복의 말씀인데 마음에 담기지 않았다. 형과 아버지가 죽고 이런 무리한 결정에 아브라함도 죽었어야 하는데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축복

▶ 첫번째이다.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다.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 영적인 축복, 육신적인 축복을 다 받았다. 영적인 축복은 무슨 축복을 말하는가? 눈에 안보이는 축복을 말하는 것이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과 인도하심의 축복을 받았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축복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축복이다. 이것은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이다. 사건과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하나님이 처리 하신다는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이 그 축복을 받았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최초의 히브리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첫 책은 창세기인데 창세기에는 인류의 시조 3명이 등장한다. 첫 시조 조상이 아담이다. 이후에 노아의 홍수 사건으로 사람들이 전멸이 되었고 노아로부터 새로 다시 시작했다. 새 인류, 새 시대의 조상이 노아이다. 그 다음에 바벨탑 사건이 터졌다. 물,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니까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다. 전부 하나님을 떠나서 전부 불신앙 가운데에 있는데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시조로 불러내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여러분의 가정과 가족 중에서 예수를 믿고 제사를 안 지내기로 했다면 그것은 시조의 축복이다. 너의 씨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더 이상 필요 없는 최고의 영적인 축복을 받은 것이다. 너의 씨를 통해서 너의 후손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구원의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즉,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그 예수님 때문에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어마어마한 최고의 복이다. 그리고 위대한 복이다. 이것을 아브라함이 받았다. 무리한 결정 요구 이후이다. 쉽지 않은 요구 이후이다.

▶ 그리고 아브라함은 육신적인 축복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축복이다. 시간이 지나가면 없어지는 복이지만 건강의 축복을 받았다. 175세까지 살았다. 75세때 부르심을 받아서 100년동안 신앙생활을 한 것이다. 아내 사라와 사별을 한 이후에도 아들 6명이나 낳는 건강을 누렸다. 우리 같으면 근육량이 줄어들고 소변주기가 얇아지면 갱년기가 오는가 걱정을 한다. 방금 전의 것도 잊곤 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다. 아주 늦은 나이에 건강을 누렸다. 또 다른 육신적인 축복으로 경제의 축복도 받았다. 자신의 집안에 318명의 가병을 두고 연합전쟁을 치룰 만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웃에 살고 있던 헷 족속으로부터 내 주님이십니다 라는 고백까지 받았다. 아브라함 당신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방백 통치자이십니다 라는 호칭을 받았다. 백인이 대다수인 미국에 살고 있는데 당신이 우리의 스승이 되십니다 라고 들은 적이 있는가? 저는 한번도 듣지 못했고 아마 영원히 듣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아브라함은 받았다. 건강도 경제도 영권도 주위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을 만큼 받았다. 후대 자녀의 축복도 받았다. 일단 기록된 것만 아들 8명, 그 중에 언약을 계승하는 이삭, 내 아들이 나의 업을 이어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큰 복이다. 아버지가 목사인데 자녀들이 주일예배에 나오지 않고 아버지가 사역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비참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한 장막 안에서 이삭과 야곱을 함께 기거했다고 나와있다. 한 집안에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삭과 야곱이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동일한 약속, 언약을 전달해준 것이다. 자녀들이 잘 되어야 그 축복을 받은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세상사람들이 볼 때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만이라도 아브라함은 진정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라는 영어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다. 세상의 불신자들도 알 만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아브라함이다.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 종교, 저 종교에서 다들 아브라함을 자신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의 언약을 주신 이유

▶ 두번째이다. 아브라함이 이토록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일단은 우리가 대충은 알고 있다. 하나님의 무리한 명령,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요구를 믿음으로 순종했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듣고 알고 있다. 하지만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는데 가나안 땅으로 나와서 살라고 했던 명령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른다. 역사 공부를 해보시면 아브라함 당시에 갈대아 우르가 조금 후에 멸망한 것을 알 수 있다. 갈대아 우르 지역이 유브라데 강 유역 근처에 있다. 아시다시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그곳이다.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했지만 역사가들은 범죄의 온실이라고 할 만큼 타락한 도시였다. 그런 동네에서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창 12장에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는데 바로 전 11장에서 바벨탑 사건이 터졌다. 즉,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바벨탑 문화 영향이 가득했던 시대였다. 세상의 부와 힘, 권력, 명예를 얻고자 우상을 극심하게 섬기던 현장이었다. 하나님은 그 현장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거기서 나오라고 한 것이다.

▶ 그리고 내가 지시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가나안 땅에 왜 가라고 하셨는가? 젖과 꿀이 흐르기 때문인가? 아니다.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기 때문이다. 현장을 바꾸라는 말이었다. 너 중심으로 살던 그것을 내려놓고 메시아 오실 그 땅으로 가라는 말이다. 멸망의 성읍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그곳으로 가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위해서 가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무슨 뜻과 무슨 계획이 있었던 것인가? 연대를 잘 생각해보라. 아담은 B.C. 4000년 전이다. 노아 B.C. 3000 년대 사람이다. 그리고 B.C. 2000대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아담의 원죄 이후에 네피림 시대까지 그 천년을 홍수심판으로 정리하셨다. 그래서 노아는 인류의 시조, 조상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나서 노아 이후에 천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바벨탑 사건이 터지고 시대가 또 멸망하게 되었다. 이때 아브라함을 부른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약 천년 간의 시대를 정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믿음의 시조로 아브라함을 부른 것이다. 노아 이후에 천년 동안 쌓여진 나 중심의 사상, 창세기 3장과 관계 되어있다. 육신과 물질 중심의 사상, 창세기 6장과 관계 되어있다. 세상성공 중심의 사상은 창세기 11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년의 업보를 정리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다. 천년 간 이어진 사단의 역사를 뒤집어버리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계획을 위하여 부르신 것이다. 천년 간의 역사를 뒤집으시려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시면서 무리한 결정을 요구한 것이다. 그것이 가나안 현장 언약이다. 왜 무리하다 라고 생각될 만큼 그런 요구를 하셨는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그 일을 명령하셨는가? 영원히 잊지 말고 기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큰 믿음을 나에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큰 계획과 축복을 준비하셨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다. 머뭇머뭇했지만 아브라함은 결국 이 일을 성공시켰다. 처음에는 다소 주춤했지만 결국 성공해서 순복했다. 이리하여 영육간에 후대에 모든 축복을 다 찾아낸 것이다.

 

3. 우리의 갈대아 현장과 가나안 언약

▶ 마지막 세번째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그 수많은 오염된 바벨탑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 한사람을 부르신 것처럼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부르시고 계신 것이다. 여러분 각자의 갈대 현장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현장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목사님 그것은 너무 무리한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을 몰라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즉, 나 중심, 개인 중심의 현장에서 벗어나라. 내가 일단 잘되어야 다른 사람도 도와주고 하나님도 섬기는 것 아닌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나 중심을 끝까지 붙잡고 놓치 않게 되면 개인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계의 벽에 부딪치게 된다. 생각과 마음의 한계에 부딪친다. 그래서 우울증이 많이 생기고 공황장애에 걸린다. 그것이 생각과 마음에 벽에 부딪쳐서 어찌 해야할 바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경제의 한계에 부딪친다. 건강의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이 약, 저 약 써봤는데 안된다. 이 의사, 저 의사 찾아가봤지만 안된다. 그것이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면 우리 개인의 건강을 컨트롤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라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손짓이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오직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신호였다. 아브라함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육신 중심의 삶을 살고 있었다. 육신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파트이다. 그러나 육신 중심으로 가면 결국은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신 중심을 돌이키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른 것이다. 영적 중심은 무엇인가? 눈에 안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다른 특징 하나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 영원한 것이 어디에 들어있는가? 하나님 말씀 안에 들어있다. 풀과 꽃은 시들고 지지만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말씀 안에 영적인 비밀이 담겨있다. 말씀을 붙잡고 있을 때 영적인 축복이 따라온다. 이런 현장으로 바꾸어야 한다.

▶ 또 세상 성공 중심에서 나와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현장에는 성공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몰라도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있다. 교회 안 다녀도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하나님을 배격하는데도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세상 중심은 허무에 부딪친다. 세상 성공자들 전부 허무에 사로잡히고 숨은 영적문제들 때문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세상 성공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일을 성공시켜야 한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던 갈대아 현장은 바로 창세기 3장, 6장, 11장의 현장이었구나. 나 중심, 육신 물질 중심, 세상성공 중심이 넘치는 현장이었구나. 하나님께서 나오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질문 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 오직 믿음, 오직 교회, 오직 전도 때문에 너무 무리하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다. 여러분들이 상상하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것보다 더 세밀하게 여러분의 미래를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상상과 계산을 넘어서는 이런 위대한 축복을 준비해놓고 여러분을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믿음의 시조, 언약의 시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그것을 다 찾아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이다. 갈라디아 3장 7절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받는다고 그 다음다음 절에 나와있다. 이 두 가지의 말씀을 29절에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고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자가 되었다.

 

♠ 결론 - 무리한 상황 속에서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는 반드시 큰 축복을 받는다.(롬4:17)

▶ 결론이다. 아브라함은 무리한 상황 속에서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가나안 현장이라는 현장의 언약을 붙잡았다. 중간중간에 믿음이 흔들렸지만 결국에는 해냈다. 믿음이 들어간 것이다. 무리한 조건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능력이 끝이 없는 분을 신뢰하게 된 것이다. 로마서 4장 17절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정하고 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부활시킬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이 있음을 믿었다. 아들 이삭이 아니면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던 것처럼 또 다른 아들을 주실 줄 알았다. 부활의 능력, 창조의 능력, 재창조의 능력,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개인과 나라, 전세계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꼭 기억하시기 바란다. 목사님 때문에, 목사님의 설교, 지시사항 때문에, 성도들의 인간관계 때문에 큰 시험이 들었다면 일단 깨달으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마어마한 축복을 내게 준비하시고 이런 상황 속에 놓으신 것이구나. 그 시험을 주는, 갈등을 주는, 문제를 일으키게 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모르시고 내게 붙여 놓으신 것인가. 절대 그런 법이 없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하나님은 전부를 알고 계신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무리한 요구, 쉽지않은 결정,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을 준비해놓고 이끄실 것이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고백하시라. 발걸음을 떼시길 바란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의 생애를 가득 채울 것이다. 

▶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어떠한 것도 주의 말씀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