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현장과 서밋 언약

October 7th, 2018

ICA Sunday Pulpit Message



♠ 서론

▶ 오늘 말씀의 제목은 노예 현장과 서밋 언약이다. 해방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금방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학생들은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막 끝나면 해방감을 느끼지 않는가? 잠시 지나면 또 페이퍼, 퀴즈,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또 올 줄은 알지만 끝나고 나면 굉장히 시원해진다. 무언 가에서 해방된 느낌을 받는다. 직장인들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갈 때가 되면 해방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글을 쓰는 작가는 어떠한가? 한 작품의 원고를 탈고하게 되면 해방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는가? 저 같은 경우에는 주일날 아침에 한국에 보내는 월요일 기도수첩 메세지를 완성하고 보내는 것부터 일과가 시작이 된다. 오늘 같은 경우에는 10월 아침 당회를 함께 했다. 이어서 1부 제자 학교 말씀을 전하고 다음으로 기관별 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합심으로 기도를 한다. 그것이 끝나면 제 방에서 예배위원들과 즉, 사회자, 기도자, 통역자, 예배 위원장, 부 예배 위원장, 저와 같이 예배를 위한 기도회를 한다. 그리고 나서는 강단에 서서 주일 설교 대 예배를 인도한다. 점심 때는 밥을 먹으며 성도님들 한사람, 한사람 기도제목을 듣고 상담도 하고 가정형편도 듣고 팀사역을 한다. 그리고 3부 중직자학교에서 말씀 인도를 한다. 마치게 되면 헌금위원분들이 헌금 계수를 할 때 제 옆에서 기도를 한다. 헌금 계수 목록리스트를 보면서 헌금 봉투에 쓴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를 한다. 그리고는 교회 전체 창문을 확인하고 전기 코드를 다 정리하고 마치게 된다. 그러면 에어컨을 끄고 정문에 키를 잠그고 나갈 때는 큰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그때는 뭔가 숙제 하나를 마친 것 같은 시원한 기분이 든다. 성도들이 다 가고 난 것을 확인하고서는 제 차를 향해서 간다. 그때는 어린아이가 된 심정으로 기쁘게 걸어간다.

▶ 우리가 무언가를 하나를 마쳐도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는데 평생 노예살이를 하다가 해방이 됬다고 한다면 얼마나 기쁨이 크겠는가? 그래서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이 그렇게 위대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약 40년간 일제강점기에 있다가 한국이 해방 되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그러니까 매년 광복절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해방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힘을 얻게 한다. 그렇다면 해방 중에 해방은 무엇인가? 바로 복음을 받은 것이다. 이 복음은 기본이 아닌가 되물어볼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복음을 깨닫고 맛보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크리스천 신자들이 복음을 모르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 대진 형제가 참석을 했다. 목사님 아들이다. UT를 졸업하고 몇개의 비지니스를 하고 있는데 인간관계가 좋아서 투자자들이 이 형제에게 붙는다. 요즘에는 무역도 하고 있는데 이것이 자꾸 대박이 난다. 이런 친구는 돈의 흐름, 경제, 비지니스에 눈이 확 열려있다. 그러니까 저런 젊은이들이 볼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많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지역에는 이런 비지니스를 하면 좋고 운영은 이렇게 하면 좋다는 것을 잘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까 안타까워 할 수 있다.

▶ 같은 원리이다. 똑같이 성경을 들고 교회에 다녀도 복음을 알고 있는 것과 복음을 모르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복음 가진 자,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자녀는 최고, 완전한 해방을 받은 것이다. 바로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고백을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완벽한 해방을 받은 것이다. 죄, 저주, 재앙, 심판, 지옥에서 완전히 해방을 받은 것이다. 영원히 해방 받았다. 영혼이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왜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용서하였다가 아니라 해방하였느니라 라고 되어있다. 용서는 물론이고 죄의 책임 마저도 끝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염려, 두려움과 같은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완전히 해방을 시켜 주셨다.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빌립보서 4장에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베드로전서 5장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즉,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고통과 부담을 사실상 끝내신 것이다. 우리의 영혼과 정신 내면 뿐만 아니라 육신 마저도 완전히 해방을 하셨다. 질병으로 시달릴 몸, 죽게 될 몸 마저도 영원히 해방을 시켜 놓으셨다. 로마서 8장에 보시게 되면 우리의 몸의 구속함을 기다린다고 되어있다. 불멸의 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실 것이다. 그래서 사도신경 맨 마지막에 보게 되면 그러한 고백을 한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나이다. 이러한 축복이 이미 와 있는 것을 가리켜서 교인이라고 한다. 신자, 크리스천, 성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한다. 이 복이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복이요 보장된 것이다. 찾아내야 한다. 빼앗기면 안된다. 속으면 안된다. 이 세상에서 어렵게 살다가 좋은 세상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속는 것이다. 물론 고생하고 순교할 시대가 따로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 원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하기를 원하신다. 얼마나 큰 복인가?

▶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감사가 회복되셔야 한다. 정말로 감사하게 되면 하나님을 높이게 된다. 찬양이 넘쳐나게 된다. 우리 주일 예배 오프닝 찬양을 할 때 제가 왜 일부러 악을 쓰면서 찬양하는지 아시는가?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대부분의 성도님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찬양은 잘 따라 부르시지 못한다. 그래서 제가 예배위원장님께 지시를 했다. 찬양팀 리더인 김범근 집사님께 곡을 바꾸라고 지시를 했다. 빅터 장로님 댁에서 부르는 영어 찬송, 주일학교 찬송으로 바꾸라고 지시를 했다. 두번째 이유는 성도가 찬양을 할 때에 천국에서 상급이 쌓인다고 누가 그랬다. 성경에 나온 말은 아닌데 천국을 보거나 갔다 온 많은 증인들의 공통적인 내용이 하나가 있다. 다시 말씀드린다. 성경에 기록된 말이 아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있는데 성도가 찬양을 할 때 자기가 살 천국의 집에 벽돌이 올라간다고 하였다. 또 다시 말씀 드린다. 성경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천국을 체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제가 언약으로 받은 것이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 성적은 저조했다. 최고로 잘 나왔던 성적은 ‘미’였다. 그만큼 제가 음치라는 이야기이다. 노래에 대해서는 알러지가 있을 정도로 불편한 마음이 있다. 그래서 어디에 노래를 하러 가는 자리면 회피하였다. 그러다가 주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깨달았다. 주님께는 내가 노래를 드려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고 그래서 찬양을 하는 집회에 가서 제가 많은 은혜도 받았다. 그래서 저는 찬양을 잘 알거나 모르거나, 음을 잘 알거나 모르거나 관계없이 저는 무조건 일부러 큰소리로만 외치려고 한다. 기분이 좋건 나쁘건 저는 항상 찬양을 하면 크게 부르려고 애를 쓴다. 여러분들에게 찬양이 넘쳐나는 생애가 되길 바란다.

▶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전달 받지 못한 자들은 어떻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노예와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과거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많이 본다. 상처에 묶여 있다. 과거의 특별한 경험이나 가슴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다. 저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때 그런 기억이 생생하다.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야 하는데 자신의 삶이 무너지기 까지 매여있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평범한 대인관계를 누리지 못할 만큼 매여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해방의 복음을 전해주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또는 돈의 노예가 된 사람도 종종 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위의 사람이나 훗날의 평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간에 사람을 죽여서라도 돈을 벌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이들은 명예나 권력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명예를 지키려고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남에게 손해를 주거나 피해를 주거나 또 죽이기까지 하는 일부 정치계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1. 노예 인생을 사는 우리

▶ 그래서 첫번째이다. 노예 인생을 사는 우리이다. 무엇에 묶여있다는 이야기이다. 지구 70억 인구 중에서 과연 몇명이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있을까. 대부분 무언가에 묶여 있어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처럼 살고 있다. 그러나 노예가 다 같은 노예가 아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요셉의 스토리이다. 그가 지금 노예의 신분에 있다. 요셉의 주위를 한번 살펴보겠다. 노예 생활을 살면서 고통 당하는 자들이 있다. 지금 요셉은 보디발 집에 있다. 보디발 주인집 주위에는 대부분의 노예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늘 주인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고 자기의 자유가 없는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수고하고 짐진 자들일 것이다. 요즘에는 노예 제도가 없어서 직접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이 미디어나 역사를 통해서 노예 생활의 처참함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지 않는가. 자기가 노예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 가운데에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노예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창세기 39장을 보시게 되면 보디발 주인집에 사모님이 있다. 창세기 39장 10절을 보시면 그 보디발의 아내께서 용모가 준수한 요셉에게 자꾸 윙크를 했다고 나와있다. 날마다 요셉에게 청했다고 되어있다. 신분과 계급은 노예가 아닌 부잣집 사모님이지만 생각과 마음이 정욕의 노예로 잡혀있다. 소유욕에 잡혀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노예인 셈이다. 막말로 이성간에 끌릴 수 있는 마음은 누구나 있다. 그런데 요셉은 뿌리치고 거절했다. 상대가 거절하게 되면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하는 것이지만 보디발의 아내는 계속 청했다고 되어있다. 신분과 계급은 주인의 아내이지만 실제적인 삶은 노예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

▶ 또 한가지 경우에는 요셉이다. 노예였음에도 불구하고 누리며 사는 인생이 있다. 창세기 39장 4절에서 6절을 보시면 흥미로운 부분이 많이 나온다. 보디발 주인이 자기집의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다고 나와있다. 한국 성경에는 가정 총무라고 나와있고 영어 성경에는 감독하는 자로 나와있다. 주인 보디발이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기고 자기가 먹는 음식 이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고 나와있다. 터치를 하지 않았다. 영어성경에는 자기가 먹는 빵 이외에는 집안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였더라 라고 나와있다. 제가 중직자들에게 일을 시킬 때가 있다. 매달 월초에 배너를 바꾸어 달라고 지시를 했다. 그러면 바꾸나 안 바꾸나 감시를 한다. 오늘 기관별 기도회에서 중직자들에게 위임을 했다. 그러면 방에 가서 잘하고 있나 감시를 한다. 그런데 보디발은 간섭도 안하고 아예 알지도 못했다고 나와있다. 무슨 뜻인가? 완전히 맡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하는 일들 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케 되었다고 나와있다. 무슨 말인가? 신분과 계급은 노예인데 실질적으로 주인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요셉이 다 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2. 노예 현장에서 서밋 언약을 누린 요셉

▶ 두번째이다. 노예현장에서 요셉이 서밋의 언약을 누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보디발 집안의 실질적인 주인은 요셉이었다. 가정 총무였기 때문에 행정, 인사, 재정 출납, 경제 싹 다 요셉이 주무르고 있었다. 사실상 주인의 기능을 한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축복이 넘쳐났다고 되어있다. 누린 것이다. 노예이지만 이럴 수 있다. 창세기 40장에 가보면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된다. 이때 요셉이 원망, 불평, 낙심을 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만난 정치범들에게 카운슬링을 해주고 미래의 진로를 밝혀주는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이 아무나 알 수 없는 개인의 미래를 예언 해줬는데 그것이 적중한 것이다.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있는데 역할은 사람을 살리는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요셉은 가는 현장 모든 곳에서 서밋의 축복과 응답을 누린 것이다. 결국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창세기 45장을 보게 되면 요셉이 어떠한 말로 그의 형들을 대하는가? 형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를 앞서 보내신 것이니 염려치 마소서. 자신을 노예로 팔아먹은 이복 형들을 위로하고 구원하고 그들의 삶을 책임지고 있다. 나이가 어려서 동생이지 맏형보다 더 큰 일들을 요셉이 지금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부모도 못한 큰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인생의 반전인가?

 

3. 밑바닥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더욱 간절하다.

▶ 요셉에게 어떤 비밀이 있었길래 이러한 축복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붙잡을 언약이다. 우리가 평생 기억해야 될 인생 교훈이다. 우리가 삶에서 적용해야 될 인생 강령이다. 우리가 삶에서 적용해야 될 생활 수칙이다. 여러분의 후대에게 유언할 내용이 이런 것이다. 살펴보겠다. 세번째이다. 밑바닥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더욱 간절하다 라고 제가 만들어봤다. 처음에는 제가 밑바닥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더욱 아름답다 라고 썼는데 여러분들이 오해할 것 같아서 간절하다고 바꾸었다. 노예로 팔려갔다. 밑바닥부터 시작했던 요셉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최고가 되는 서밋의 언약이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상황과 환경 때문에 잊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타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요셉이 붙잡은 하나님의 언약은 총리까지로 이끈 것이다. 형제들의 곡식 단이 내 곡식 단에게 절하더이다. 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머리가 되는 것이다. 지도자가 되는 것이고 권위자가 되는 꿈이었다. 즉, 서밋이 되는 꿈이었다. 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평생 언약으로 붙잡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통과한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삶의 현장 속에서도 그 언약을 붙잡고, 그 언약에 맞는, 그 언약 다운 언행 심사를 한 것이다. 어떤 현장 속에서 어떤 것이었는가?

▶ 요셉이 살고 있었던 현장은 첫째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밑바닥 인생들과의 부딪힘이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시게 되면 이 꿈을 이야기 하니까 형들이 시기와 질투를 하고 죽이려고 까지 했다. 그 요셉의 형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요셉의 형들도 하나님을 믿고 섬겼지만 시기, 질투, 증오, 살의를 요셉에게 품었다. 하나님은 알지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여기에 요셉은 속지 않고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대부분 여기에 흔들린다. 이 집사가 저렇고 저 장로가 저렇다. 두고 보자는 식으로 반응한다. 지금 우리가 기도할 때인 것 같다. 오직 하나님만 같이 바라보자.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중직자를 제가 거의 못봤다. 이 사람한테 가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 사람한테 가면 저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까 서밋으로 부르심을 받아도 이것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같이 밑바닥 인생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 또 요셉은 하나님을 아예 모르는 밑바닥 인생과 부딪힌 것이다. 아까 말씀드렸던 보디발의 아내이다. 이 여자가 어느 정도까지 밑바닥 인생이었는가? 자신의 정욕, 소유욕이 충족이 안되니까 상대방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자신의 분풀이로 삼아버린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되면 상대방에게 못할 짓을 스스럼없이 하는 이들이 가끔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예 모르는 밑바닥 인생이다. 정말 요셉은 억울하게 당한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변명하거나 호소하거나 한탄하거나 맞고소 하지 않았다. 내게 서밋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에 자신의 상황을 맡겼다. 즉, 그러한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봤다는 이야기다. 하늘을 바라봤다는 이야기다. 깜깜한 칠흑 같은 밤에 별 하나가 얼마나 밝게 빛나는가? 모두가 불신앙, 부조리, 불합리, 부패 속에 있지만 요셉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 하늘에 계신 하나님, 역사하실 하나님, 축복하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고 간절했겠는가? 그리고 요셉 주위에는 구원 받아야 될 밑바닥 인생들이 많았다. 감옥에서 중요 관직에 있었던 술 맡은 관원장,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났다. 고위 공무원에서 일시에 죄수가 된 것이다. 잘나가다가 인생의 밑바닥을 친 그들을 요셉이 살려낸 것이다. 나중에는 요셉이 왕 앞에 설 때, 애굽 국가의 중대사가 생긴다. 왕에서부터 관리, 신하 모두가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이다. 여기에 요셉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해결책을 제시해서 그들 전체를 살려냈다. 7년간 대기근에 빠져서 아사할 뻔했던 각국백성들을 비축한 양식을 가지고 다 살렸다. 밑바닥 인생들 사람들 속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고 최후까지 서밋 언약을 붙잡고 인도 받았던 것이다.

 

♠ 결론

▶ 결론이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서밋으로 이미 부르셨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처럼 그렇게 해야 될 순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시게 되면 우리가 어떠한 자들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우리가 언제 택하심을 받았는가? 창세전에 선택을 받았다. 지구가 생기기 전에 받았다. 모든 피조물, 사탄 마귀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란다. 왕 같은 제사장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말한다.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손에 잡힌 자, 누가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 가겠는가? 어두운 데서 우리를 불렀다는 것은 인생의 12가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시켰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은 시대를 살릴 전도자로 부르셨다는 말이다. 여러분의 모든 만남이나 사건, 그리고 현장에서 서밋의 언약을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서밋의 언약을 묵상하고 고백하시기 바란다. 서밋의 언약대로 적용하고 증거해보기를 바란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시대를 살릴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3기초 응답은 기본이다. 이것은 긍정적 사고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확정하신 그 언약을 내가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이루시고 역사하실줄로 믿는다. 하나님이 뒤집어 놓으신다. 그런 하나님의 시간표는 반드시 오게끔 되어있다.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막을 자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 요약 정리하겠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서밋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기억하시기 바란다. 그 생각을 지속하고 있을 때 믿음의 영성, 축복이 자녀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현장의 상황, 모습에 속지 말고 서밋의 자세, 서밋의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한 예를 들고 마치겠다. 독일의 한 성을 다스리던 영주의 후손,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라는 사람이 있었다. 500년 동안 귀족 집안으로 이 사람 자체도 백작의 칭호를 받고 있다. 그의 누나는 1조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대 부호와 결혼했고 알렉산더의 와이프는 왕실의 후손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증손녀였다. 그런데 알렉산더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가난해져서 가난과 익숙해져 있던 상태였다. 하층민처럼 살 수 밖에 없었었다. 나중에는 직장에 들어갔지만 해고를 당해 연금도 없이 살아가게 되었다. 많은 생각을 하고 나서 어차피 가난을 바꿀 수 없다면 고민하거나 낙심하거나 불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백작으로서의 여유와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가난한 삶을 그대로 글을 썼다. 헬스장에 갈 수가 없으면 공원에 가고 집이 산 중턱에 있기 때문에 걸을 때마다 건강. 외식할 돈이 없으면 집에서 내가 직접 요리해서 먹으면 된다. 자신의 가난에 무너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살면서 백작으로서의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고 진솔하고 세밀하게 자신의 에세이를 쓴 것이다. 이것이 묶여져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돈을 벌게 된 것이다. 이 사람은 돈이 갑자기 들어왔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고 상당부분을 어려운 사람들한테 헌신하면서 계속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유명세를 타서 왕실 전문기자로 채용이 되었다. 세계적인 부자 빌 게이츠와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이 나와있다. 그 사람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비록 망하는 한이 있더라고 의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아함을 실천하는 길이다 라고 말했다. 가난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자신의 백작이라는 신분을 끝까지 가지고 간 것이다. 부자인 자신의 누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자신의 아내와 함께 담백하고 진솔한 삶을 살았는데 결국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여러분의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영원한 신분을 붙잡고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 기도합니다.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 지극히 큰 최고의 신분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바닥의 현장 속에서 서밋의 언약을 붙잡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