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현장과 미스바 언약

November 4th, 2018

ICA Sunday Pulpit Message



♠ 서론

▶ 은퇴한지 이제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설교를 한지는 3년이 되었다. 그래서 3년 만에 설교를 하게 되니까 조금 어설프다. 어설프다는 말은 처음 제가 40년동안 목회를 하면서 설교를 해왔었지만 지금 여러분 앞에서 지금 설교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조금 어색하다는 말이다. 특별히 통역을 하는 분과 함께 설교를 하려니까 내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지 몰라서 조금 준비가 서툴렀다. 까만 머리 목사님이 말씀을 증거하다가 흰머리 목사가 말씀을 증거하니까 여러분들도 이상 하실 것이다. 목사들이 설교를 듣고 평할 때는 굉장히 예민하다. 여러분의 목사님은 정말 설교를 잘하신다. 제가 볼 때 A학점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할 때는 김 목사님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 받으시고 언약에 충실히 임하시길 바란다. 제가 설교를 준비할 때 가급 적으로 설교를 15분 이상으로 하지 않았다. 설교가 길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짤막하면서도 핵심적인 설교인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준비하다 보니까 자꾸 길어졌다. 이것이 늙은 증거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통역을 하니까 시간이 배가 될 것이다. 오늘 시간이 조금 길어지더라도 용서하시고 잘 들으시길 바란다.

▶ 서론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살마과 행동에서 우리는 이 말씀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지 말할 수 없다. 아들들의 잘못을 알고도 아버지 엘리는 그냥 방치했다. 잠언 8장 13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신다. 엘리가 치매 환자가 아닌 이상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의 의중을 더 깊이 인정했다. 사무엘상 29절을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의 죄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사랑한 것이 첫번째 죄이고 둘째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를 경멸하여 예배처소에서 시중드는 여인들과도 성적관계를 가진 것이다. 그들은 어처구니 없는 불량자들이었다. 그 결과 3장 13절을 보시면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어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고 되어있다. 제사장이 여호와를 몰랐다는 말이 얼마나 비극인가. 홉니와 비느하스는 성막을 음란 굴로, 죄를 고백하는 장소가 아닌 죄를 저지르는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그때에 엘리가 마음에 찔려서 하는 말이 2장 25절 전반에 보면 여호와께 공공연히 도전하면 도움을 받을 길이 없다 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권면을 들은 아들들이 25절의 하반절을 보면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라고 말씀하신다.

 

1. 무너져버린 이스라엘 현장

▶ 본론 첫째로 이스라엘 현장은 영육 간으로 무너져버리게 된다. 실로의 예배가 한 여름 밤의 악몽과도 같았다. 하지만 제사 의식 타락과 윤리적 타락 때문에 다 망해가는 줄 알았는데 성경을 잘 읽어보면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기름이 엿보인다. 2장 26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 백성을 위하여 새롭고도 경건한 지도자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고요한 하나님의 계시의 계획이 하나하나 실현되는 것이다. 나라의 영적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부패했을 때 백성들은 다 혼미한 상태로 떨어지고 만다. 백성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이방 신과 아스다롯과 바알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이 이방 신을 섬긴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들은 이방 신을 섬기면서 죄를 범하므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오직의 신앙을 상실했다. 이는 언약 백성으로서 언약 현장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게 되는 결과이다. 이로 인해서 나라 안팎이 큰 환란에 처하게 된다. 블레셋의 침략을 당하게 된다. 이 때 죽은 병사들이 3만 4천명이다. 작은 수가 아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둘 다 죽음에 처해진다. 중요한 것은 이때 하나님이 법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가셨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 두번째 전투에서 법궤까지 빼앗기고 만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엘리 제사장은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을 당하게 된다. 하루 아침에 날벼락이 일어나 엘리는 의자에서 떨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게 된다. 또한 홉니의 부인은 임신 중에 남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서 아기를 진통 중에 낳게 되었다.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지었는데 그 뜻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으로 지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은 심지어 아무리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제한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세우기도 하시고 때로는 낮추기도 하신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와 경배의 대상이지 결코 이용할 만한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행이나 액운을 막아주는 부적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 예배의 대상이고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합당하게 영광을 받으실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2. 현장을 회복하려는 사무엘

▶ 둘째로 현장을 회복하는 사무엘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 사무엘은 선지자, 중보자로서 심판 받은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개를 촉구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이게 했다. 이스라엘에게 선포한 사무엘의 교훈은 세가지이다. 첫째는 이방 신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고 말씀했다. 무슨 말인가? 우상을 버리고 회개를 촉구하라는 말씀이다. 둘째는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고 그분만 섬기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의 신앙회복이다. 셋째는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에서 구원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법궤는 물론 블레셋에 빼앗긴 땅까지도 도로 찾게 된다. 이것은 위기의 찾아온 현장의 평화를 말씀한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기억하고 돌아가야 할 말씀이 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했다. 그래서 응답을 받았다. 우리는 오늘 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2장 31절과 32절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말씀하신다.  사도바울은 말씀하기를 로마서 8장 34절에서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 많으신  그리스도의 기도에 의지하고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이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대상 사실만큼 감동적인 것이 없다. 사무엘이 여호와께 기도 드린 후에 기념비를 세워서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했다. 그 뜻은 여기까지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셨다 라는 뜻이다. 사무엘이 분명 여호와의 도움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런 명칭을 세웠을 것이다. 그 문구에는 한층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사무엘의 기도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옛날의 은혜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말씀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도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라는 찬송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한 것 같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고백을 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이게 했을 때 회개를 촉구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이방 신과 우상을 다 버리게 된다. 우리도 살아온 모든 길에서 은혜와 긍휼인 에벤에셀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나의 생활 가운데 혹시 우상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면 이 성전에 나가시기 전에 다 내려놓고 나가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심과 같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우리의 현장에 활기차게 넘쳐 나가기를 여러분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우상을 버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현장 회복을 위한 기도를 시작하라

▶ 셋째로 현장 회복을 위한 기도를 시작하기 바란다. 참된 시작을 위해서 중요한 질문 세가지를 하겠다. 첫째로는 숨겨진 나의 불신앙이 무엇인가? 사도행전 1장 6절이나 13절, 5장 1절과 1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혹시 여러분들이 말씀을 읽다가 언약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때가 있는가? 기도가 잘 되지 않는가? 아직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귀하게 여기는가? 그렇다면 그는 언약의 백성이 아니다. 언약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을 하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복 주시고 구원하심으로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을 거부하고 죄와 죽음에 빠졌다. 이 시간 나의 불신앙이 무엇인가를 조용히 마음속으로 살펴보시기 바란다. 복음 아닌 자기 생각에 뿌리를 내리면 자신도 모르게 갈팡질팡하는 신앙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 생명, 예수 능력의 비밀을 알고 복음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무엇이 달라도 다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연속적으로 기도응답을 받는 삶이 되고 그 삶이 생산적인 삶을 될 수 밖에 없다. 혹시 여러분 복음이란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제가 어느 교회에서 이 말씀을 물어봤다. Good news라고 답을 해주셨다. 복음을 제대로 모르고 교회를 다니는 허당인 사람들이 많다. 복음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복음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내가 경험했는가 라는 말이다. 성경을 읽어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도 행복하지 않다. 점점 더 무거운 짐만 내 어깨에 눌리는 것 같다.

▶ 두번째로는 나는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진정 행복한가 이다. 하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었던 여러분과 나를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언약 백성들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을 해주심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한다. 얼마나 행복한가?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내 노력과 내 지혜와 내 열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대해서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사는 성도의 태도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말하기를 이 세상에 죽을 병 걸린 삶과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하는 삶이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구원을 말씀하기를 영생이라고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 삶은 하나님의 부요에 참여하는 삶이기 때문에 오늘 날 우리가 겪는 여러가지 초조와 근심과 문제, 스트레스에 걸리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전지하심, 전능하심, 무한한 사랑, 무소부재의 자유, 그리고 영생의 힘이 있는 삶이므로 신적 삶이라고 한다. 요셉이나 모세, 사무엘, 다윗, 이사야, 엘리사, 바울을 보시라. 여러분들이 말하기로 7 램넌트라고 한다. 그들에게 왔던 어떠한 고난과 역경, 시기, 누명, 비방 심지어 죽음까지도 복음에 굳건히 뿌리내린 그분들을 넘어뜨릴 수 없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우리가 요즘에 인터넷을 통해서 들려오는 소문을 본다. 어떤 교회의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기 위하여 뒤에서 돈을 쌓아놓고 교회와 교인들을 우롱하고 있다. 교회에 돈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의 비방 거리가 되고 말았다. 전도 길을 막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 교인들이 전부 흩어지고 있다. 하지만 램넌트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들은 복음에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모든 역경과 시기와 누명과 비방을 받아도 거기에 굴하지 않았다. 우리들도 돈이나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잘 간직하고 누리시기를 축원한다.

▶ 마지막으로 세번째 질문이다. 현장의 운동에 참여하고 계시는가? 사도행전 2장 42절과 5장 42절을 보면 성도들이 초대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면서 주의 이름으로 교제하고 음식을 나누며 기도에 힘썼다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성전에 있던지 집에 있던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하신다. 이때부터 현장은 살아나고 하나님 말씀은 점점 힘을 얻어서 제자가 일어나고 심지어 이방인들도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말씀을 보면 복음이 아니면 고통에 멍든 현장을 살리는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다. 혹 지금 어떤 문제 앞에, 혹은 답답한 일에 놓여있다면 복음적 눈으로 선택하고 결단하시기 바란다. 이 믿음이 쌓여 갈 때 복음의 뿌리는 계속 굳게 내려간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명의 복음을 누리고 예수를 믿었더니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래서 그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주께서 행하시는 모든 선한 사역에 증인으로 나를 쓰시기 위함이다 라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다. 이런 운동에 여러분 모두가 24시간 기도하시면서 변치 않는 믿음으로 정말 주께서 보시기에 ‘내가 너를 아노라’ 인정받는 적극적인 믿음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땅 위에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던 저희를 구원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사무엘이 에벤에셀을 세운 것처럼 주께서 우리 마음에도 에벤에셀을 세우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우상 문제, 여러가지 문제들을 주 앞에 내려 놓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저희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언약 붙잡고 주만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