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파쇄(깨뜨림)

December 10th, 2017

ICA Sunday Pulpit Message



♠ 서론 – 창조적 파괴, 붕부필파

▶ 목욕을 하면 우리의 피부가 깨끗해지고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옷을 입고 목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목욕의 청결함과 시원함을 얻으려면 하루 종일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야만 합니다. 또,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예방접종을 맞습니다. 주사를 맞으려면 옷을 걷어서 팔을 드러내야 합니다. 잠깐이지만 따끔한 고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 따끔한 아픔을 피하려고 옷을 안 걷고 바득바득 버티게 되면 간호사가 주사를 놓을 수 없습니다. 무언가 중요하고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잠깐의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잠깐의 불편함을 통과해야 합니다.

▶ 봉황이라고 하는 가상의 새가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새입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새가 있는 것도 그 알을 깼기 때문에 나올 수 있습니다. 봉황이든 닭이든 알을 깨서 나와야만 합니다. 이것을 한자 사자성어로 봉부필파(鳳復必破)라고 옛날 사람들이 사용했습니다. 중요한 것을 얻고 드러나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야만 합니다. 이런 비슷한 의미의 경제학 용어가 있습니다.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만들어낸 말로 ‘창조적 파괴’라고 합니다. 창조적인 파괴를 해야 하는데 못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1900년대 초반에는 돛 달린 배를 가지고 대서양을 왔다갔다하는 무역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증기선이 개발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후발주자가 치고 들어온 것입니다. 기존의 범선 업체가 화들짝 놀라서 돛 달린 범선을 크게 만들기로 했습니다. 보통은 배에 3개의 돛이 있는데 돛 7개를 장착한 메가급 범선을 제조해서 1907년도에 운송을 하려했습니다. 결국에는 Lawson 이라는 이름의 배가 완성이 되었지만 돛이 7개나 달리고 너무 무거워서 출항하기도 전에 배가 전복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돛 달린 범선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무언가가 나왔다고 하면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새로운 아이템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고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창조적 파괴를 강의할 때 자주등장하는 케이스 입니다.

▶ 돈을 많이 번 미국 의사, 그렉 레만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워낙 기술이 좋았기 때문에 환자들이 많았고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예쁜 아내와 두 자녀들, 그리고 부유한 집과 차,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가운데 무언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평생 원하는 일을 해서 많은 것을 이루었는데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났고 가족들에게 화를 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옆집에 교회를 다니는 크리스천이 항상 반갑게 인사를 해도 짜증이 났습니다. 레만은 그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못된 짓을 하고 있는 위선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짜 종교인들을 때려잡자 라는 마음으로 크리스천들이 읽는 성경의 허구성을 밝혀 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자기와 똑같은 의사였던 누가라는 사람이 성경을 썼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정확히 기록된 사실을 본 것입니다. 이상해서 실제로 유적지를 가보기도 하고 많은 자료를 찾아서 봤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레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것은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생이 바뀌고 주옥같은 그의 깨달음이 신약성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과,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 자신의 기존 내부 시스템이 무너지고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줄 알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짜로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깨달은 이것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평안이 임했습니다. 무언가 내적인 시원함을 힘입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을 깨뜨려서 새로운 인생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부인이 볼 때 새 남편 같다 했고 아이들도 예전의 아버지 같지 않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의사 그렉 레만은 너무나 행복한 것을 고백했습니다. 모든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라고 그가 고백을 했습니다. 레만은 복음 때문에 자신이 누리고 있던 삶의 틀을 깨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기존의 생각과 지식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영원한 축복을 얻은 것입니다.

▶ 오늘 제목이 하나님의 깨뜨림 입니다. 영어로는 God’s grind 라고 표현했습니다. 파괴가 아닌 파쇄입니다. 깨뜨려서 없애는 것을 파괴 라고 합니다. 깨뜨려서 해체한다는 뜻 입니다. 파쇄는 깨뜨려서 가는 것입니다. 파쇄의 정확한 영어번역이 grind가 아니지만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목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깨뜨려서 가는 작업이 있습니다. 오늘은 치유메세지 3번째 입니다.

 

1. 하나님은 깨뜨림을 통해 새로운 응답을 주신다.

▶ 첫번째 입니다. 하나님은 깨뜨림을 통해서 새로운 응답을 주십니다. 큰 아름드리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 출발했습니다. 땅에 심겨져 씨앗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씨앗의 껍질을 깨서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줄기를 내어 자라날 수 있습니다. 곤충이나 생물도 마찬가지 입니다. 화려하고 고운 빛깔의 나비도 애벌레의 껍질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애벌레의 껍질을 빠져 나와야 성충이 되어서 날아가는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제왕 독수리도 알에서 깨어 나와야 독수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왜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이나 가정,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말했던 레만 의사 같은 경우는 개인이 깨뜨림을 당해서 회심한 경우입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파쇄를 통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내려 놓은 것입니다. 기존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지와 오해를 깨뜨린 것입니다. 착각을 깨뜨린 것입니다. 고집과 독선의 틀을 깨뜨리고 주님 앞에 돌아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가정도 하나님이 깨뜨리십니다. 구약성경에는 룻이라는 성경책이 있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는 바람에 이사를 갔습니다. 사사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다스리는 땅을 떠났다고 되어있습니다. 떠난 것도 떠난 것이지만 하나님이 싫어하는 모압 땅으로 이사를 갔다고 되어있습니다. 두 아들, 두 며느리를 데리고 갔다고 되어있습니다. 아들 2명이 줄줄이 사망했습니다. 남편도 죽었습니다. 덩그러니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 여자만 남은 것입니다. 두 며느리 중에 한명은 상황을 봐서 결국에 본가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단 둘이었습니다. 가정이 다 깨지고 해체되어서 포기한 시어머니는 남아있는 며느리에게 너도 본가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예비한 이방의 여인, 며느리 룻이 신앙고백을 합니다. ‘어머님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님의 여호와를 나도 섬기겠습니다.’ 그러면서 룻은 시어머니의 믿음과 인생 여정에 동참합니다.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요즘 연세 드신 분들이 돈이 없으면 아이들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나이 많고 망해서 아무것도 없는 그 시어머니의 말을 완전히 순종합니다. 결국에는 며느리 룻은 보아스라고 하는 남자와 만남의 결정적인 응답을 받습니다. 보아스는 부자였기에 경제가 회복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보아스와 룻의 가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습니다. 영원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 가정을 하나님이 깨뜨리지 않았으면 그런 축복으로 연결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과 강대국의 역사를 보면 흥망성쇠가 반복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할 때 그 왕조를 하나님이 깨뜨렸습니다. 새 왕조를 일으켜서 응답 속으로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역사를 확인하면 다 나옵니다. 이집트와 바벨론, 페르시아, 아람, 로마에 계속 반복이 되었습니다. 모든 인생과 만물은 하나님의 새로운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파쇄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깨뜨림을 통과했다.

▶ 두번째 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깨뜨림, 하나님의 파쇄 과정을 전부 통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 욥 입니다. 동방에 사는 거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 알다시피 재앙을 당해서 자녀들이 모두 즉사했습니다. 욥 자신도 질병에 걸려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불평, 불만, 불신앙, 원망을 하면서 욥을 버렸습니다. 가까이 있던 친구들마저도 욥을 정죄하면서 나무랐습니다. 하나님이 괜히 이렇게 재앙을 허락했겠느냐며 숨겨진 것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욥은 답답해 했습니다. 가정이 깨졌고 인간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깨짐의 과정, 불 같은 연단 이후에 욥은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나를 연단한 이후에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려 하심이구나’ 결국에는 하나님은 욥에게 배로 축복을 하셨습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깨뜨린 것이 아닙니다.

▶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 중에 사도 바울은 가문, 학식, 명예가 최고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손이었습니다. 당대의 양대 학파 중의 하나였던 가말리엘 학파의 수제자였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었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 그룹에 들어갔습니다. 특권층이었습니다. 명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적인 열심도 대단했습니다. 이단이라고 불리는 예수교를 잡아 없앨 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구원받지 못한 종교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만남으로 한방에 바울의 인생이 깨졌습니다. 어느 정도로 깨져서 변화되었습니까? 평생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는 전도자로 살만큼 변화되었습니다. 지구의 영적 지도가 바울을 통해서 완전히 바뀔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전세계에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남자가 사도 바울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파쇄 과정을 겪습니다. 이것을 믿고 받아드리고 인정하고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도 이 깨뜨림의 과정을 손수 통과 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시게 되면 예수님이 붙잡혀 가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깨뜨림의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온몸이 깨졌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마음이 다 깨졌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예수님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온 몸이 깨졌습니까? 따귀를 맞고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허리에 창으로 찔림을 당했습니다. 심장은 터지고 내장이 파열되어서 물과 피가 다 쏟아져 나왔습니다. 극한의 고통을 동반한 육체가 깨졌다는 말입니다. 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마저 다 무너졌습니다. 제자 중의 하나, 가룟 유다가 밀고를 했습니다. 가장 아끼는 수제자가 배신을 했습니다. 여타의 제자들도 다 도망갔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과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끔찍한 수모와 배신감을 당한 것입니다. 고뇌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 하나도 예수님의 고통에 동행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변호해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자가 없는 야속함, 허망함에 빠진 것입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깨짐의 고통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7절에 말씀하십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것이 영화의 대사가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 하나님 아들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어머니 마리아의 뱃속에서부터 성령으로 함께하시던 하나님이십니다. 성장할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앞에서 키와 지혜가 자랐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분이 사역을 하실 때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습니다. 모든 메시지를 전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시, 분, 초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함께 동행하고 말씀 주시고 힘을 주시고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던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버리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절규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고통을 맞이하고 모든 것이 무너지고 깨지던 순간이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살면서 이런 하나님의 깨짐과 파쇄의 과정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죽었다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의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하며 불신앙을 토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달리 반응합니다. 나 같은 천하의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도 감사한데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는구나 하면서 주님을 찬송하고 감사기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실 것입니까? 어느 대열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을 감격하게 하고 흥분하게 만들어서 천하를 진동 시킬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심령을 아프게 하고 안타깝게 할 것인가 우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실라와 감옥에 갇혔을 때 두들겨 맞은 깨짐의 고통 속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 기도와 찬송을 받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뛰신 것입니다. 감옥 문이 흔들리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깨짐의 상황에 시험 들지 않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 이를 위해서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증인의 삶, 감사의 체질을 미리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깨뜨림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더 새롭고 큰 영광으로 반드시 이끄십니다. 분명한 계획과 완전한 이유를 가지고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하나님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으십니다. 완벽한 이유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유일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파쇄 과정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영원한 구원의 길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도 봐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에게도 크거나 작은 파쇄의 과정이 있습니다. 당연히 길거나 짧은 파쇄의 과정이 있습니다. 이때 두려워하거나 이상해하거나 당황하지 마십시오. 혼자 불신앙을 해서 원망의 함정에 빠져도 안될 것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불효자입니다. 부모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무기 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내게 해주신 것이 무엇이냐며 심지어는 대들며 반항을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어떻습니까? 철없는 자식들 입니다. 참으로 가관이고 가엽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한 것을 준비하시고 깨뜨리 시는데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효자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이 파쇄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신다

▶ 마지막 세번째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파쇄의 과정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려 하십니다. 잘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봐야 감사기도가 나옵니다. 첫째로 축복의 큰 그릇을 만드시기 위해서 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이 아니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삶의 본거지를 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갈 수 있었던 모든 혜택의 근거지가 갈대아 였습니다. 재산이나 인간관계, 날 도와줄 가족, 힘들면 같이 대화할 수 있는 친구와 이웃, 이 모든 것이 갈대아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모두 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기존 혜택의 시스템을 깨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봐서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게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복의 근원이라고 하는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려고 하는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열방과 천하만민을 살리는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버리고 깨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유업과 응답,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면 크고 작은, 길고 짧은 파쇄의 과정이 나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지고 있던 재산을 내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굳게 잘 맺어온 인간관계를 포기하기 싫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익숙하고 편해진 삶의 환경을 벗어나기 싫었습니다. 몰라서 그랬습니다. 죽어도 안 가려 했고 안 내려놓으려 했습니다. 못 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를 조금씩 하나님이 설득 하셨습니다.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인식,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 생활환경을 초월한 여유, 안식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씩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빨리 깨지면 하나님이 빨리 체험케 하십니다. 내가 늦게 깨지면 응답이 늦게 왔었습니다. 게으르게 깨뜨리면 축복이 지지부진하게 된 것을 경험했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마스쿠스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아나니아 제자가 주님께 기도하며 물었습니다. ‘주님,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러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용할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을 찾아가서 선교할 나의 그릇,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할 그릇, 가이사 앞에 서야할 그릇, 회당마다 찾아가 램넌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고 후대와 미래를 살릴 그릇입니다. 이 바울의 부르심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도와 선교 그리고 램넌트를 살리고 세울 그릇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위대하신 하나님의 큰 소원을 담을 그릇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눈이 열리고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 깨달음,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부르심에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이 부르심 소망, 소명에 대해서 찬송이 나와야 합니다. 이 눈이 열리면 사람 때문에 시험 들지 않습니다. 잘해주고 못해준 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부르심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면 원망, 불평, 불만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역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게 되면 고난도 달고, 헌신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왜 나한테 잘해주지 않느냐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게 되면 사람이 담대해집니다. 이런 감사가 있게 되면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찬송이 있게 되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큰 그릇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파쇄에 향하여 믿음을 고백 하고 감사의 기도와 찬송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 또 한가지 이유는, 오늘 본문처럼 깨끗한 마음과 올바른 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깨뜨림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생각을 내려놓게 됩니다. 불평, 불만, 불신앙이 사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의 고집과 독선을 내려놓게 됩니다. 오해, 착각, 원한, 고만, 열등감, 섭섭함, 나를 알아줘야 한다는 나 중심적인 생각을 내려놓게 됩니다. 일일이 따지게 되지않게 됩니다. 시시비비를 가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1-2학년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대중목욕탕을 갔는데 아버지는 열탕 속에 들어가서 계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어서 따라 들어가려 했는데 그 열탕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데일까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열탕 속에서 시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이런데 들어와봐야 한다고 유혹하셨습니다. 결국에는 이를 악물고 들어갔습니다. 너무 뜨거워서 살 껍질이 타 들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제 어깨를 지긋이 누르시면서 100셀때까지 있어보라고 했습니다. 이때 제가 아버지께 왜 거짓말을 했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되어서 왜 자식을 속이냐고 대들거나 항의할 수 없습니다. 오직 드는 생각은 100을 세는 것 한가지 였습니다. 오직 100을 세는 것에만 몰두를 하고 싶었지 다른 생각은 하기도 싫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시원하냐고 물어봤지만 대충 ‘예’ 라고 대답하고 100을 계속 셌습니다. 하나님의 파쇄 속에 있게 되면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정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주옵소서. 내 안에 올바른 영을 만들어 주옵소서. 주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 올바른 영, 성령충만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 그리고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즉, 내 인생의 주체는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의 생활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것들이 깨지면 깨질수록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드러나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셨으면 이 고백을 신약성경으로 기록되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이 인정하고 기뻐했다는 증거입니다. 내 육신의 것들, 내 천연적인 성격과 체질이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결론 – 고운 가루 에바와 찧은 기름 힌의 교훈을 배우라.  (출 29:40)

▶ 그래서 결론으로 에바 가루와 찧은 기름이 나옵니다. 완전히 찧은 가루입니다. 고운 가루 에바와 찧은 기름 힌, 출애굽기 29장의 말씀입니다. 갈고 찌면 어떻게 됩니까? 성분은 그대로 이지만 성질은 고운 가루로 바뀌게 됩니다. 부드러운 향이 나는 기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물로 부어 반죽하게 되면 주인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에바와 힌은 단위의 이름입니다. 곡식의 양을 재는 것을 에바라고 합니다. 한 바구니 정도를 한 에바라고 표현합니다. 액체를 측정하는 단위가 힌입니다. 곡식을 빻아서 고운 가루로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거침이 없고 모남이 없는, 즉 겸손하고 겸비한 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곡식을 볶아서 찧게 되면 거기에서 기름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부드럽고 향기 나는 기름을 주님께 드린다는 말입니다. 에바와 힌, 둘 다 자아라는 두꺼운 껍질을 깨뜨려야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파쇄의 시험을 통해서 나 중심의 껍질을 철저하게 부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깨뜨릴 때 중요한 미래를 두고 계심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구나. 나에게 무언가를 맡기고 내게 무언가를 부을 것이 있구나.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것이 있구나. 그런 믿음과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수려하고 잘 자란 향나무를 나무꾼이 도끼로 찍으면 향나무는 도끼에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향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깨뜨림 이라고 하는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러한 과정에 있다면 새로운 계획에 대해서 기쁘게 하옵소서. 미래의 영광 때문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며 통과하게 하옵소서. 깨끗한 마음의 그릇을 준비하게 하소서. 올바른 영을 갖춘 큰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