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은 안식 없는 세대에 안식을 주신다

April 30th, 2017

ICA Sunday Pulpit Mes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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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은 안식 없는 시대에 안식을 주신다

(마 11:25~30)

 

<서론>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히 11:6)

1.     사람과 세대의 불신앙은 항상 있어왔다.

(1)    스스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선포했던 세례 요한의 의심 (요 1:29~34, 마 11:2~3)

(2)    예수님이 친히 보이신 권능의 기적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 (마 11:20, 21)

(3)    모든 믿음과 불신앙의 일들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계산될 것이다 (마 11:22~24)

 

2.     참된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안에만 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겨라 (마 11:28)

(2)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멍에를 기쁘게 받아라 (마11:9)

(3)    주님의 멍에를 통해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라 (마 11:9)

 

3.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는 질문이 있다

(1)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분명한가? (마 11:27, 마 16:16, 요 1:49, 요 11:27, 요 20:28)

(2)    내 삶에서 천국을 침노하고 있는가? (마 11:12, 마 6:33)

(3)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고 만족한가? (마 11:28~30)

 

<결론> 하나님의 아들(들)은 안식 없는 시대에 안식을 주신다 (마 12:8, 눅 6:5)

 

 

◈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히 11:6)

1.     사람과 세대의 불신앙은 항상 있어왔다.

예수님께 가장 크게 쓰임 받았던 사도 바울이 한 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그에게로 나아가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것을 알고 믿어야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드릴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어줄 때 기쁨이 오고 감동이 되죠. 1955년도에 하와이에서 연구가 있었습니다. 그 섬에는 800 여명의 신생아 어린이가 태어났는데요, 그 아이들을 대상으로 30년동안 긴 조사가 진행된 것입니다.  800명으로 대상을 했으니까 대규모 연구였겠죠. 종단연구라고 불리웁니다. longitudinal이 세로잖아요, 그러니까 위에부터 다음 세대까지 쭉 세로의 세대를 연구한 건데요, 이 800명의 신생아 중에서 200명, 1/4이죠, 여기 태어난 애들을 보니깐 소위 고위험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연구진들은 판단을 미리 했죠, 이 아이들은 사회의 부적응자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10년, 20년, 30년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결과가 온 거에요. 모든 예상을 깨고 그 200명 중에서 1/3 에 해당되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72명이 부유한 환경의 애들보다 더 잘 성장했다고 합니다. 더 도덕적인 삶을 살고 물질도 부유한 삶을 살았다고 해요. 부모님의 경제력 지원을 못 받았는데도요, 온갖 실패와 좌절속에서도 72명은 훌륭하게 잘 자랐다고 합니다. 72명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통점이 하나가 발견 되었습니다. 그 72명의 주위에 단 한 사람의 존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잘 자란 아이에 주변의 그 한 사람의 존재는 어떤 존재였냐면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그 아이를 믿어주고 그 아이의 편이 되어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할머니나 할아버지, 또는 친척, 때로는 이웃 사람, 또는 학교의 선생님 등 그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었대요.  잘 성장한 아이들 옆에는 단 한명이라도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는 믿음의 말을 해주는 존재가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내 편이 되어서 믿어준다는 것이 이토록 큰 힘이 됩니다. 이건 미국 하와이 연구 결과이고요,  한국을 예로 들겠습니다. 직장인 미혼 남녀의 설문 질문입니다. 300 여명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애인에게 가장 고마울 때가 언제인가?

Ken 선생님은 채권사님에게 어떨 때 제일 고마움을 느낍니까? (Supper Time?) 2위가 내 투정을 받아줄 때 고마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3위, 20%를 차지하는 것이 사소한 말을 하는데 그것을 기억해줄 때 매우 기뻤다고 합니다. 4위, 한 11%가 나왔는데, 내 걱정을 자기 일처럼 걱정해줄 때 그토록 고마웠다고 합니다. 1위는 뭘까요, 거의1/3 나왔는데요. 아무 말없이 믿어줄 때 무척 고마웠다고 합니다. 이 믿음을 줄 때 사람으로 하여금 평안을 얻게 하고 힘을 얻게 한다는 것이죠. 반대로 주위사람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게 되면 사람은 힘 빠집니다. 낙심하게 되고 심지어는 슬퍼하기까지 합니다.

 

1.     사람과 세대의 불신앙은 항상 있어왔다.

(1)    스스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선포했던 세례 요한의 의심 (요 1:29~34, 마 11:2~3)

이런 불신의 상황, 사람, 시대는 항상 있어왔습니다. 지금 예수님 이야기잖아요. 예수님을 안 믿어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대가 예수님을 인정을 안 해줬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마 11장을 보는데요, 첫번째 절에는 예수님이 열심히 사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손님을 맞이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세례 요한이 보낸 사람입니다. ‘저희 스승, 세례 요한께서 예수님을 찾아 뵙고 질문을 하라 그럽니다’ 이렇게 손님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세례 요한은 당시에 헤롯왕을 정면으로 비판했다가 감옥에 붙잡혀 갔잖아요. 감옥에 있으니깐 자기가 못 나오니까 제자들을 보낸 것입니다. 열심히 사역하시느라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고요, ‘당신이 바로 그 메시아가 맞습니까? 당신이 맞다면 당신을 기다려야 됩니까? 아니면 당신이 아니라면 또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누가 했다고요? 세례 요한이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첫 판부터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했던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물가에 있던 세례 요한을 향하여 예수님이 다가와서 세례 달라고 무릎을 꿇잖아요,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알아보고서 내가 어찌 감히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까 제가 받아야지, 저는 당신의 신조차 만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 봤거든요.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믿음이 좀 흔들렸던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지금 이스라엘의 왕으로 온 거잖아요.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거라고 했는데, 로마를 깨부수고 예수님이 왕으로 서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례 요한이 풀려나야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상을 받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꾸 돌아 다니면서 세리와 천한 사람들과 같이 밥 먹고 자기 면회 한번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믿음이 흔들렸던 것 같애요. 물론 성경에는 그 부분이 표현이 안되어있습니다. 성경 앞부분에 있던 세례 요한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의 모습을 세례 요한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정말 맞냐, 당신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금까지 행한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느냐, 마 1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인이 눈을 떴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다, 저주의 병, 문둥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았다,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구약의 예언들처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그런데도 나를 못 알아보느냐, 다른 사람을 네가 찾겠느냐, 다른 사람을 찾으면 멋들어지게 입은 왕궁에 있는 사람들을 네가 찾아야겠냐, 예수님이 조금 열 받았던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 평가를 합니다. 물론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중에서 최고의 남자이니라 가장 큰 자니라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를 면치 못할 것이다. 최후 구약의 선지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대단한 인물이죠. 이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 400년전 말라기를 통해서 예언되어 있었어요. 마지막 때에 엘리야가 나타날 것이다, 그가 세례 요한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침노를 하게 되면 다 가져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의 축복들을 다 내 것으로 가져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믿음이 없게 되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지자라도 비록 구원을 받았어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면 천국에 들어가기 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세례 요한처럼 내가 거창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더라도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알아버리게 되면 천국에서는 큰 사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평가한 거거든요. 이만큼 예수님에 대한 믿음,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2)    예수님이 친히 보이신 권능의 기적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 (마 11:20, 21)

예수님이 또 말씀하세요.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권능의 기적을 보고도 나를 의심하느냐 그러면서 비유를 하나 들죠. 이 세대가 어떤 세대냐하면 장터에 아이들과 똑같다, 아이들이 피리를 불면서 막 음악을 동원하게 되면 친구들이 가만히 춤도 안 추고 리액션 없이 가만히 있다 이 말입니다. 반대로 막 슬피 울면 친구가 옆에서 같이 가슴 아파해야 되는데 가만히 있다 이겁니다. 비유를 들다가 바로 또 실제 예를 하나 더 드십니다. 세례 요한이 금식할 때는 세례 요한 보고서 귀신들린 자라고 사람들이 얘기했거든요, 세례 요한처럼 금식하지 않고 예수님이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고 포도주를 같이 즐기니까 저 예수는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비난한 것입니다. 못 알아 본거란 얘기죠. 예수님이 그토록 기적, 치유를 많이 베풀었는데도 저 고라신이라고 하는 동네, 벳새다, 가버나움 동네 사람들이 잘 안 믿었어요. 그 동네에서 귀신들을 쫓아내고,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했으며, 백부장의 종을 살려내고, 그 가버나움 동네에 소문이 나서 모든 병자가 왔는데 다 치유해 버렸어요. 그런데 안믿는 거에요. 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 구약 최고의 선지자 세례 요한,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세례 요한도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믿었던 하나님의 사람마저도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병자들,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해 준 고라신, 가버나움, 벳새다 동네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역하고 가는데 저 동네, 이 동네 들려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러지, 동네 사람들은 안 믿는다 그러지, 예수님은 어떻겠습니까?

 

(3)    모든 믿음과 불신앙의 일들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계산될 것이다 (마 11:22~24)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의 인성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후회 하시고 낙심하시고 안타까움과 배신감을 표현하셨습니다. 이 불신의 세대,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훨씬 낫다, 열 받으신 거 같애요,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고 나서 곧바로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면, 예수님은 인성뿐만이 아니고 신성도 가지고 계신 완전한 하나님이시잖아요.  이런 모든 불신앙의 환경과 상황, 사건, 현상이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 주권 속에 있음을 바로 안 것입니다. 25, 26절에 나오죠.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여, 이런 모든 것들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잘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알아야 할 세례 요한이 모르고 있다는 거죠, 엄청난 기적의 수혜를 받은 동네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예수를 믿어요. 오천명이 배 곯고 있을 때 소자, 어린아이가 오병이어,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예수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알아야 할 사람들은 모르고 엉뚱한 아이들은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알려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옳은 일입니다. 이렇게 만드신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이런 믿음의 자세와 태도가 하나님의 아들들인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 할 자세 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자세의 고백을 못하게 되면 이게 상처가 돼요. 상처가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게 되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격도 호전적인 성격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결국에는 불신앙의 사람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죠. 어느 목사님은 ‘불신앙의 생각이 영적인 암이다, 치유할 수 없는 병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 밑에서 모든 일이 벌어짐을 알 때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어쩌다가 재수없어서 터진 일이 아니라 봐야만 하는 일입니다. 나에게 필요하니까요. 영적 사실을 볼 수 있는 그릇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발판 삼고 갱신하라고 하는 축복입니다. 말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고, 바른 이해, 바른 수용이 되어지게 되면 상처가 아물고 중요한 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보느냐 안보느냐 그게 큰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전부 하나님의 손에 있는데요, 전능자, 창조자이시면서 천지의 주재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급을 주십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모든 걸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정확하게 계산 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주권에 맡겨놓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결국에는 내게 축복이 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역사에는 불신앙의 세력과 방법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우리가 흔들리면 안됩니다. 교회의 중직자 또는 목사님이 마음에 안든다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 모든 부분들이, 도리어 그런 상황이 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노아, 아버지의 큰 실수가 있었잖아요. 술 먹고 잠 들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드디어 노망이 들었구나, 이거 큰일 났어’ 이것을 그냥 말해버린 함은 저주를 받고, 그 일이 일어났지만 그것을 복음의 방법대로 덮은 셈과 야벳은 창대한 축복으로 시간표를 바꿔버린 것입니다. 복음의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 도리어 문제가 축복이 될 것 입니다. 여러분이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참된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겨라 (마 11:28)

두번째는 뭐라고 되어 있냐하면, 이런 믿음이 없는 세대를 향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하실 건데요, 그런 와중에서 참 평안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길이 있음을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까 이 모든 상황과 일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다 하면 끝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중요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모든 것을 주셨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이외에는 아버지를 또 알 자가 없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무슨 말이겠습니까?  마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백을 합니다. 목수의 아들을 향해서 고백을 합니다. 나사렛 출신 청년을 향하여 고백합니다. 당신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목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가구를 많이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하는 훌륭한 분이십니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좋은 신학교를 나왔구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네게 알려주는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즉, 하나님께서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가 그리스도,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이미 끝냈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아는 자만, 자신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그 예수님께 가져갈 수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 짐을 주님께 가져가서 맡기는 겁니다. 즉, 내 인생 문제를 주님께서 처리할 능력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남들이 알지도 못하고 내가 해결 할 수 없는 이 문제를 당신은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주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축복의 하나님께서 기쁨을 얻게 되면 더 큰 축복을 내리십니다.

 

(2)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멍에를 기쁘게 받아라 (마11:9)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멍에를 매라- 기쁘게 받으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 사람으로부터 이 사람이 주는 숙제, 미션, 멍에를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종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긍휼하심이 임합니다, 자비하심, 불쌍함이 내게 임하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바리새인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세리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기도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율법을 잘 행할 수 있도록 해서 감사하고, 십일조를 드리게 해서 감사하고… 이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솔직히 하나님이 다 주셔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세리는 하나님 앞에 미안하고 죄송하고 죄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리의 기도에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제껴버렸잖아요. 이게 무슨 말이죠? 세리의 낮아짐, 겸손함을 하나님이 보시고 불쌍함으로 함께하셨습니다.

멍에를 매라. 교회에서, 목회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미션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시는 멍에 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긍휼하심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통해서 주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함을 우리가 배워 갑니다. 우리가 일들을 처리하면서 일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주님의 미션을 감당하면서 주님에 마음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어지고 주님의 것으로 내가 채워지게 됩니다. 바울이 그렇게 고백하잖아요, 내가 주의 가는 길, 고난의 잔을 채운다고. 그 때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즉, 하나님의 목표를 향하여 따라갈 때 하나님의 평강과, 하나님의 안식과,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과 안식일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거하니까 우리에게 안식이 임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3)    주님의 멍에를 통해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라 (마 11:9)

이 불신앙의 와중에서도 평안함이 밀려온다면 주님의 멍에를 우리가 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게 되는 것이고요, 내가 자라나는 것이고요, 그리고 남에게 설명하기 힘든 그런 희열이 올라오게 됩니다. 믿음의 선대들, 전도자들이 이런 길을 걸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단기선교만 갔다 와도 선교사님들이 이렇게 길을 걸어 왔구나 많이 배우게 됩니다. 제가 몇 번 메세지를 주고 전달해 보라고 합니다. 메세지를 받고 그냥 읽어줄 수 없잖아요, 메세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외울 것은 외우게 됩니다. 이해할 것은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서 말씀 사역자를 이해하고 말씀 사역자 가슴과 통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아서 헌신 해볼 때, 교회 중직자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의 보이지 않던 작은 부분들이 다시 돌아보게 되고 치유됩니다. 늘 예배에 늦게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찬양인도자가 되었다 그러면 연습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일찍 일어납니다. 일찍 샤워도 하고 화장도 하고 그러면서 배웁니다. 그렇게 해서 왔는데 멤버들이 하나도 안왔다면 열 받는 것입니다. 심판이나 받아라 그러면서 이게 다 주님의 뜻이다 라고 합니다. 인성과 신성이 왔다 갔다 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죠? 주님의 온유함을 배우고 주님의 겸손함을 체득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 안식이 있습니다.

 

3.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는 질문이 있다.

(1)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분명한가? (마 11:27, 마 16:16, 요 1:49, 요 11:27, 요 20:28)

마지막입니다. 세번째입니다. 이런 축복을 이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많은 인생의 순간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으로 승리하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진실한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기만 하더라도 성령인도를 받습니다.

어떤 질문들이냐, 오늘 그 대단했던 세례 요한마저도 예수님의 실제를 제대로 몰랐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하고 나와의 관계를 점검하고 질문해 보셔야 합니다. 마 11:27절의 본문처럼 하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가 있냐 말이에요. 내가 물고기 잡고 있을 때 예수라고 하는 청년이 날 불렀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향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을 예수님이 불렀어요, 요 1장에 나옵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선한 게 나올 게 있나, 나사렛에서 메시아 안나오잖아요, 베들레헴에서 오잖아요, 나다나엘이 그렇게 얘기했거든요.  예수님께서 네가 무화가 밑에서 묵상기도 했던걸 내가 보고 있었다 그랬더니 고백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요 11장을 보시게 되면 나사로가 죽었잖아요. 여동생 마르다가 슬픔에 잠겨 있는데 그때 예수님이 물어보죠, 다시 오빠가 살을 것을 믿느냐?  예, 마지막 때는 살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고 있잖아요 그 고백 뒤에 예수님께서 선언을 한 거에요. 무덤을 향해서 ‘나사로야, 나와라.’ 중요한 고백 뒤에 중요한 일이 터진 것입니다. 죽어서 이미 부패한 오빠가 살아난 것입니다. 요 20장에는 도마와 예수님이 이야기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안 믿어집니다. ‘내 손을 봐라 못 자국이 있지 않느냐’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도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안하고 My God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기분이 나쁘다고 지워버렸습니다. 도마는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만든 성경에, 왕국회관이라고  이 구절을 지워버렸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내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아닌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해요. 도마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냐면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끝냈다 이 말입니다. 모든 것을 끝내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나의 모든 것을 계산하는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사 9:6절의 말씀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올 때 목사님이 설교하는 예수님, 이것이 아니고요  세상 사람들이 다 없어져도, 지구의 70억 인구가 날 비난하더라도 딱 한 분, 그리스도는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내가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그곳에 같이 가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영원히 나와 동행하기로 작정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축복을 주실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나한테 잘해 주는데요, 그래서 내가 예수님한테 보살핌을 너무 많이 받으니까 미안하니까 고맙다고 할 거를 듣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엡1장을 보게 되면 영원히 찬송케 하려 함이라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히 인간적인 표현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필요한 거 없죠, 사실. 스스로 계신 분이에요. 전부다 없어져도 되는 거에요. 이상하리만큼 구원하신 우리를 향해서 계속 잘해주십니다. 집 나가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배반하고 와도 가락지 끼워주고 좋은 신발 신겨주고 좋은 옷을 입혀서 잔치를 벌여주십니다. 계속 응답을 줘가지고 고맙다는 소리를 듣게끔 하십니다. 그러한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믿습니까? 그런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가 과연 무엇이냐 말입니다.

 

(2)    내 삶에서 천국을 침노하고 있는가? (마 11:12, 마 6:33)

또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것을 제대로 못 누렸잖아요. 그래서 천국에서 믿음이 약해서 작은 자 되지 말고 천국을 침노할만한 믿음을 회복하라 그러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내 유익, 나 중심이라고 하는 저주의 틀을 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오직의 제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충만 구하는 전도자, 증인의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도전해라, 믿습니까? 천국이 예비된 하나님의 나라의 예비된 확정된 축복들을 찾아내도록 극대의 노력을 하고 극대의 헌신을 하는 거에요.

어제 토요일 날 여기 하루 종일 모임이 있었잖아요. 젊은 애들이 끝나고 멀리 집으로 가야 하니까 고생스럽다 하고 전송을 하는데 갑자기 ‘여기 친구 집에서 자고 갈 거에요’ 라고 그러는 거에요. 다음날은 주일 예배 있고 오늘은 렘넌트 훈련이니까 아예 작정을 하고 남의 집에 자러 온 거에요. 젊은 사람들은 남의 집에서 잘 안 자거든요, 다른 사람들이랑 화장실 쓰는 걸 싫어합니다. 그런데 훈련을 받을려고 다른 사람 집에서 자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를 위해서 자기를 내려놓고 천국을 침노한 겁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 많지 않을 거에요. 아, 이 사람들 축복 받겠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 수준은 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걸로 믿습니다.

 

(3)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고 만족한가? (마 11:28~30)

마지막 질문입니다. 과연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고 행복하느냐? 예수님의 시선과 내 시선이 같아질 만큼 예수님의 관심이 과연 내 관심이 되었는가? 예수님의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가 내 의지가 되느냐? 예수님의 목표가 내 인생목표가 되었는가?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주신 미션이 가볍고 쉬울만큼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이게 행복하냐 말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좋아지게 되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저 형제는 정말 사랑하는지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런 사랑의 원리를 모르면 돌아이로 봅니다. 사랑하면 그렇게 됩니다. 내게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시키는 일이 마냥 즐겁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시키는 일, 사람이 시키는 일로 치부되어집니다. 질문을 해보세요. 내가 너무 좋다, 주님이 시키는 일이 좋다. 그런 질문을 통해서 바라던 답을 듣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의 아들(들)은 안식 없는 시대에 안식을 주신다 (마 12:8, 눅 6:5)

결론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안식 없는 세대에 안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를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없는 사람들, 현장을 향해서 우리가 안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고요, 다른 사람에게 평안과 안식을 전달하는 자가, 나눠주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보면 불안해 지는 사람이 있죠. 조금 대화하게 되면 불편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종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색이 바뀌면 겁나기 시작하는 거에요. 폭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내가 실수한 것을 이 사람이 분명히 알아요, 본 것 같애요. 그런데 이 사람이 보고도 알고도 모른 척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미안해질 수밖에 없죠. 이것이 미국사람들이 말하는 매너 입니다, 에티켓 같은 거죠. 잘난체 하는게 아니라 그 영혼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약속 안 지켰잖아. 너 이 일들 했잖아.’ 틀린 말이 아니라도 이 영혼은 깨져 나가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복음 안에 서야 합니다. 대화할 때 마다 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안에 상처가 있구나. 이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구나, 알고 있으면 감정싸움하지 않게 됩니다. 이게 갑자기 왜이러나 이러게 되면 안 질려고 하다가 싸우게 됩니다. 상대방을 보고서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영적 서밋이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안식을 내가 먼저 누리고 이 시대에 전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다운 겉과 속이 되게 하옵소서. 불신앙의 세대마저 하나님께서 처리하시고 결산하실 줄 믿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