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교회의 사람들 (9) - 전도의 일 때문에 다툰 사람들

December 8th, 2019

ICA Sunday Pulpit Mes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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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 PDF (Korean)


♠  서론

▶ 러브 스토리 하나 말씀드리겠다. 영국 중세시대이다. 그 당시는 교황과 황제가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황을 응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황제 편을 드는 그룹들이 있었다. 특별히 영국에 교황을 지지하는 귀족 가문이 있었는데. 몬테규 패밀리다. 황제를 따르는 귀족 가문이 있었다. 서로 원수처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몬테규가의 젊은 청년 하나가 파티에 참여했다. 파티 안에 굉장히 아리따운 자매 하나를 발견했다. 알고 보니깐 그 여자가 카톨릭 가문의 딸이었다. 서로 사랑에 빠져 죽고 못 살았다. 수도승한테 상담을 받고 몰래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아리따운 자매의 아버지가 자기 딸을 다른 귀족의 아들에게 정약 결혼을 시킬려고 계속 준비를 했다. 아리따운 딸은 그걸 반대하였다. 이래 저래 안되니깐 극한의 처방을 하였다. 자기가 몰래 결혼했던 그 청년과의 사랑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약을 먹었다. 겉모습은 죽은 것과 같이 보이지만 빈사 상태에 빠지는 약을 먹었다. 자기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깐 스스로 자살한 것 처럼 보인 거다. 그리곤 쓰러졌다. 다들 놀랬다. 그런데 이 사실을 청년이 알지 못했다. 와서 보니깐 사랑하는 자매가 죽었다. 그래서 죽은 그녀 옆에 그 청년은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빈사 상태였던 여자는 약 기운이 깨어나고 일어났다. 보니깐 사랑하는 청년이 죽었다. 너무나 놀래고 슬퍼서 칼을 빼서 자기의 가슴을 찔러 역시 죽었다. 지독한 사랑이었는데 끔찍한 슬픔으로 끝을 맺었다. 그 청년의 이름이 무엇인가? 로미오다.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가? 줄리엣이다. 부모님 조상적부터 원수처럼 싸우니깐 그 후대들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는 소설이다. 위대한 작가 셰익스피어가 지은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 유명한 소설을 읽어보았냐고 물어보지 않는가. 로미오와 줄리엣 읽어봤냐? 안 읽어봤다면 창피하니깐 로미오는 읽어봤는데, 아직 줄리엣은 안 읽어봤다. 들키는 것이다. 소설 뿐만 아니고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다 원수지간 대립은 항상 있다. 세상의 역사, 성경의 역사, 교회의 역사 봐도 다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때 냉전시대라고 있었다. 미국하고 소련이 해체되기 전에 러시아 연방하고 항상 으르렁댔다. 거기에 맞물려서 남북한이 항상 대립하였다. 이스라엘과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도 항상 전쟁하고 대립했다. 요즘은 어떤가? 홍콩사태가 있다. 친 중 또는 반 중 이렇게 극심하게 싸우고 있다. 얼마전에는 한국과 일본이 무역분쟁으로 한참 대립각을 세웠다. 어디에나 다 있다. 그리고 언제나 있었다. 성경에도 마찬가지다. 성경 안에 사람들의 얘기이기 때문에 예외가 없다. ‘아브라함’하고 조카 ‘롯’하고 대치했다. 그들의 종들이 서로 맞붙어 싸웠다. ‘사라’라고 하는 와이프하고 ‘하갈’이라 하는 첩하고 대립하였다. 사라는 아이가 없었고 하갈은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갈이 멸시하였다. 사실상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다. 너무나 화가나니깐 남편에게 말해서 하갈을 쫓아냈다. 가정의 얘기에도 대립이 있었다. ‘이삭’도 마찬가지다. 그 지역의 왕인 ‘아비멜렉’과 대립하고 싸웠다. 이삭의 아들들인 ‘야곱’과 ‘에서’ 역시 싸웠다. 태중에서 부터 싸웠다고 한다. 출생하고 나서는 동생이 형을 속이고 도망갔다. 형 에서는 군사를 준비하며 원수를 갚을 날만 기다렸다. 야곱의 많은 아들이 있는데, 요셉 아들하고 그의 이복형제들하고 대립하였다. 시기질투해서 왕따시켰다. 하나님이 택한 선민이라고 하는 그 가정과 가문 안에 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respect를 받은 다윗왕 역시 사울왕과 라이벌 관계였다. 이스라엘 나라 역시 그 안에 있는 가나안 족속과 대립하였다. 블레셋 족속하고 늘 원수처럼 대치하였다. 블레셋 족속의 거인 골리앗이 바로 쳐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제거한 것이다. 끊임이 없었다. 예수님 당시 어땠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태어났으니깐 뭐라고 천사가 말하였는가? “하늘의 영광, 이 땅의 평화” 그런게 있다. 과연 평화가 왔을까? 예수님과 유대교 종교인들은 늘 싸웠다. 예수님은 유대교인을 향해서 “화 있을진저…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말했다.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단이다. 신성모독을 범한 놈이다.” 이렇게 십자가에 죽이려고 했다. 끊임이 없다. 성경에 이렇듯이 모든 곳에 다 있다. 자세히 보면 다툼과 대립이 없었던 곳, 없었던 시절은 없다. 그럼 답은 뭔가?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다툼 속에 있을 수 있다. 그 때 어떻게 해야겠는가? 지금까지 서론에서 말씀드렸던 사람들 중에 언약의 대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을 붙잡고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승리하는 것이다. 성격과 관계없이 수준과 관계없이 언약잡은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승리케 하셨다. 결국 마지막에 누가 계산하는가? 결국 마지막에 누가 심판하시는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 그러면 승리할 줄 믿는다.

 

1. 사람 사는 곳에 다툼이나 대립각은 언제나 있다.

▶ 문제는 같이 언약을 붙잡고 있는 교회 안에 오늘 기송주 권사님이 얘기했듯이, 교회 안에 한 팀 안에 다툼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짧은 본분에 보시게 되면, 한 참 환상의 콤비라 일컬을 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전도 사역을 잘 했던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심하게 다투었다. 우리가 함께 합독한 내용을 잠깐 설명하자면, 1차 전도여행을 했다. 환란과 논쟁가운데서도 잘 마쳤다.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 바울이 먼저 얘기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각성해 전했는데, 다시 재방문 해서 그 성에 있는 형제들이 잘 하는가 살펴보자 제안하였다. 하나님의 일을 했으니깐 사후점검을 해보자는 뜻이다. 근데 그 말을 들은 바나바가 다시 또 의견을 내놓았다. “좋다 가자” 어차피 우리가 일꾼 도우미가 필요하니까 ‘마가 요한’을 데려가자고 말했다. 이때 성숙한 바울이였다고 한다면 “글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라고 동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바울이 열 받았다. “그 놈의 자식 1차 전도여행할 때 중간에 도망간 놈 아니냐? 어떻게 데려갈 수 있겠느냐? 합당치 아니하다.” 반론을 펼쳤다. 무단 이탈한 것이다. 여기 군인이 계시지 아니한가? 군인이였던 분 계시지 아니한가? 무단 이탈하면 뭔가? “우리 Juan’장로님, 미국 군대에서 무단 이탈하게 되면 어떻게 높은 사람이 처리합니까?” (Bad things)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 어떻게 보면 영적 군사이고 하나님의 군사인데. 결국에는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심하게 다투었다.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해야 하는데, 일꾼을 써야하는데, 일꾼 선발기준에 차이가 생겼다. 이해가 가는가? 이 바나바하고 마가 요한은 조카사이다. 삼촌 조카 사이다. 여러분 마가의 다락방 알지 않는가?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다. 마스터 베드룸이 아니고 다락방인데 120명 정도 들어가는 큰 룸이다. 그러면 과부 마리아가 마가의 엄마 마리아가 부자라는 얘기인가? 아니면 가난하다는 얘기인가? 부자라는 얘기다. 바나바와 마리아가 남매 지간이다. 바나바는 부자다. 가족이니깐 기회를 한 번 더 줘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삼촌의 마음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유하게 자란 아이들이 이게 문제다. 그래서 나는 가난하게 살았던거에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부모님의 과잉보호를 받게 되면 뇌 기능이 저하된다고 나와있다. 친구들끼리 놀이터에서 막 노는 아이하고 엄마 아빠가 계속 나가지 못 하게 하고 과잉보호하는 아이하고 조사를 했다. 뇌의 크기를 조사했다. 부모님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아이들은 자기 선택의 기준과 여백이 없다. 배고프면 울어서 음식을 먹으면 되고, 내가 조금 힘들다면 엄마한테 짜증내면 된다. 자기가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을 해서 나갈 것인가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이다. 전두엽의 크기가 상당히 작았다고 한다. 마가가 조금 그러지 않았나 싶다. 큰 집에 부유하게 살다가 전도여행 가면서 환란당하고 하니깐 도망간 것이다. 그런데 바울 입장은 무엇인가? 다메섹 도상에서 전격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주님의 뜻을 알게 된 것이다. 복음전해야 되는구나. 내가 고생한 이유와 이스라엘 나라 조국이 망한 이유가 바로 복음 놓쳐서 그렇구나. 그래서 평생 복음 전하기로 결단하였다. 인생을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을 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다. 너무나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다. 근데 수준이 안 되고 함량미달인 사람을 사역자, 동역자로 세울 수 없다. 바울의 입장도 맞다.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의견이 충돌할 수 있다. 여기에 감정까지 폭팔하게 됐다. 같이 감정을 폭팔하고 같이 다투었다. 같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대전도자 바울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쓰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에 perfect한 남자다 보시면 안된다. 실제로 보시게 되면 바울은 심각한 영적 문제자였고 우울증 환자였다. 바리새인의 직분을 받을 만큼 가정도 이루었지만, 많은 신학자들이 “아마 와이프와 헤어진 것 같다”라고 해석할 정도다. 너무나 은혜 받았는데, 너무나 중요한 일 인걸 알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하고 절대 갈 수 없다라고 강하게 주장을 한 것이다. 보시라. 가만히 생각해 보시라. 바울은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안디옥 교회까지 올 수 있었는가? 바나바가 픽업한 것이다. 예수님 만난 후에 큰 은혜는 받았는데, 복음을 전하다 보니 사람들이 전부다 꺼려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교제하지를 않았다. 이 상황을 바나바가 보았다. 바나바는 마음이 참 인자한 분이다. 거둔 것이다. 같이 끌고 다닌 것이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의 핵심맵버가 될 수 있었다. 바나바의 경제적인 도움, 정신적인 도움을 받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면 나를 도와준 분이니깐 마음은 맞지 않지만, 조금 더 지켜보자며 동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도 알고 나도 알고 여러분이 알다시피 다투지 않는 것이 ‘베스트’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제 막 1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2차 전도여행이 시작할 때 쯤에 아직도 바울이 분에 못 이기는 성숙하지 않은 단계임을 볼 수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마가를 억지로 데려가려 했던 바나바나, 그 놈은 안 된다며 자기 주장만을 강조했던 바울이나 똑같다는 말이다. 그걸 아주 고스란히 기록해 놓은 것이다.

 

2. 한 팀에 속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었다.

▶그런데 문제는 똑같이 다투었지만, 다투고 난 다음이다. 다투고 난 다음에 각자 그들의 행동은 완전히 달랐다. 오늘 본문에 보시게 되면, 바나바는 서로간에 합의하지 않은 채 또는 화해하지 않은 채 마가요한을 데리고 그냥 떠나버렸다. 2차 전도여행 프로젝트는 바나바의 개인 비즈니스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일인가? 안디옥 교회를 세우신 성령께서 따로 부르라고 명령했던 선교사요. 하나님의 일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바나바가 그것을 놓친 것이다. 감정에 너무 휩싸이다 보니깐 그것을 못 보았다. 그런데 바울은 다투고 난 다음에 정신을 차렸다. “하나님의 일인데 내 주장이 너무 강했구나” 자각하고 깨달았다. 2차 전도여행을 위해서 교회에 보고하고 교회 형제들에게 축복 기도를 받고 떠났다. 오늘 사도행전 15:40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이렇게 나와 있다. 킹제임스 버젼을 보게 되면, “being recommended by the brethren unto the grace of God.” 이런식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사실 다 형제 자매이지 않는가. 그런데 선교단체가 하도 형제, 자매라 부르고 사고를 많이 치니깐 교회 안에서는 조금 그런 부분을 견제하기 위해서 장로님, 집사님이라고 부른다. 교회 형제라는 말은 중직자란 말이다. 교회의 중직자들이 함께 보고를 받고 기도를 한 것이다. 쉽지 않은 어려운 2차 전도여행을 가는데, 주님의 은혜를 부탁한다고 기도한 것이다. 그 축복의 기도를 받고서 바울은 그제야 ‘실라’라고 하는 도우미, 제자를 이끌고 출발한다. 바울이 그게 틀렸다. 바나바와 바울이 헤어졌는데, 바나바가 먼저 가버렸다. 바나바와 바울의 행선지 방향을 한 펀 살펴보시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먼저 어디로 갔는가? 사도행전 15장에 보시게 되면, 한국 성경으론 ‘구브로’, 영어 성경으로 ‘Cyprus’ 그 지역으로 먼저 가버렸다. 1차 전도여행 때, 즉 사도행전 13장에 보시게 되면, 처음으로 간 곳이 구브로이다. 1차 전도여행 했던 곳을 재방분하자고 서로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인격 좋은 바나바가 치사하게 갔던 길을 먼저 말도 안 하고 선점해 버린 것이다. 늦게 출발한 바울은 하는 수 없이 어느 쪽으로 갔는가? 시리아’ ‘시실리아’ 육로를 통해서 반대로 돌아갈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다툼 이후에 그들의 행동 방식, 다툼 이후에 그들의 선교 여정, 그 두개를 보니깐 하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바울의 손을 들어준 걸 우리가 다 알지 않은가. 이 이후에는 바나바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 말의 뜻은 바나바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인가? 바울이 사역을 다 때려치고 은퇴했다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계속 전도했고 교회를 위해 도왔다. 그런데 성령의 눈은 바울에게 꽂힌 것이다. 그들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신 것이다. 우리의 대단한 인격보다도 “아 나는 부족하지만, 다툴 수 있지만, 이게 하나님의 일이니깐,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되겠다.” 그런 중심을 가진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얘기다.

▶그러면 오늘 메시지 설교 답이 나온 것이다. 누구나 기준 관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누구나 의견 출동할 수 있다. 그러다가 누구나 감정 폭팔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다투고 있는, 이 싸우고 있는, 대립하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 일 때문에 그런 것이냐. 아니면 끝까지 내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것인가. 질문 해보셔야 한다. 그래야 끝까지 성령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찌하든지 간에 성령의 인도를 받도록 애를 써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인정받는 두 성령충만한 제자 선교사 바나바와 바울이 대판 싸운 것이다. 그래 놓고선 교회 중직자들한테 가서 전도여행 갔다오겠습니다. 축복하시고 후원해달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축복기도를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에 나의 자존심을 내려 놓는 것이다. 내가 정말 그렇게 하고 있는가 질문하란 얘기다.

 

3. 다툼을 전후로 우리가 해야 할 질문 세 가지

▶ 결론이다. 오늘부터 우리가 인생수칙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툴 수 있다. 그 때 다툰 이후라든지 또는 다투기 직전이라든지 질문해보라. 세가지를 질문하라. 내가 지금 다투는 본질이 말씀성취와 관계가 있는가? 언약성취와 관계가 있는가? 아니면 내 자존심을 지키려하고 내 이익을 챙길라고 하는 것이냐. 질문을 해야 한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쫒을라고 하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니깐, 하나님과 통해야 하니깐. 나와 여러분이 말씀성취의 자리에 있기를 축원한다. 우리 일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여러분들 인생 마지막이라도 정말 하나님이 내게 말씀을 주셔서 이루었다는 신앙고백이 나와야 한다.

▶ 열왕기상 8장에 보게 되면, 솔로몬 왕의 신앙고백이 나온다. 8:20에 보면, 솔로몬이 말하는 것이다. 성전건축을 지으면서 하나님이 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첫번째 말이 무엇인가? “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 다음절이다. “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즉, 섬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따라.

▶ 23절이다.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 24절이다.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

▶ 56절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통하여 무릇 말씀하신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

▶ 여러분의 인생이나 나의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 또는 인생 말년에 이런 신앙고백이 있기를 축원한다. 내가 말씀 붙잡고 텍사스에 왔다. 주님 말씀 때문에 내가 비즈니스를 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언약대로 나를 식주인으로 세우셨다. 예를 들면 이러한 신앙고백이다.

▶ 두번째 질문이다. 내가 지금 다투어서 감정이 폭팔되어 있는데, 내가 지금 하나님께 기도로 연결되어 있는가? 내가 원하는 바나 나의 주장이 하나님께 기도로 연결되어 있나. 하나님 앞에 섰다는 얘기다. “하나님 제가 지금 굉장히 열받아 있습니다.” 그거하고 “아! 정말” 이거 하고 다르다. “주님 저는 지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거 하고 “저놈의 자식”하고 다르다. 하나님 앞에 기도로 연결되어 있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를 통해서 중요한걸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에스겔서 36장이다. 내용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러가지로 앞으로 축복하시겠다고 작정하시고 선포하신 내용이다. 이것 저것을 다 축복하겠다는 얘기다. 그리고 마지막 끝에 단서를 하나 단다. 37절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뢰기를 원하신다. 이미 주실려고 작정하신 축복마저도 기도받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 축복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비록 무너졌지만,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받을 자격이 안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인정하기에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을 모르면, 신앙생활 수 십년 해도 안 되는 분들이 계시다. 그러면 이제 교회 탓하는 것이다. 목사를 탓하거나, 장로를 탓하거나 그렇다. 이런 부분을 잘 아시고 기도로 늘 연결될 수 있기를 바란다.

▶ ㅡ우리는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다툴 수 있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노출될 수 있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말씀성취, 기도응답, 전도열매에 연결이 되어있나. 우리가 늘 연약하고, 부족하고, 실패했다 하더라도 주님안에 거하게 되면, 하나님이 열매를 주실줄 믿는다. 그게 믿음이다. 그게 신앙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 열매놓치지 말아야 겠구나” 사람을 구원하고, 또 그들을 제자로 세우기 위해서, 열매를 제대로 맺기 위해서, 나를 양보하고 내려놓고 희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해방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하진 않다. 어린심령들이 있기 때문에” 약한 사람 때문에 자기가 절제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순간 순간 그리스도, 전도에 연결되어 있기를 바란다. 평생 복음 연결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조금 제대로 하자, 놓치지 말자 그런 의미에서 3오늘을 하는 것이다. 오늘의 말씀, 오늘의 기도, 오늘의 전도. 여러분들에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있게 될 것이다. 백년의 응답, 천년의 축복, 영원한 증거를 반드시 주실 것이다. 양 옆에 서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순간 순간 주님 안에” “평생 복음안에”

 

♠  기도

▶ 주께서 오늘도 말씀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다툴 수도 또 감정에 휩싸일 수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특별히 그 이후에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인도를 꼭 받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잃지않고 찾아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