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는 강한 성이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녹취 자료 ♣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러분과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되어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중세시대에 마틴 루터라는 한 수도사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진리를 깨닫고 하늘로부터 오는 영혼의 평화를 누리고 참된 구원의 기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우리 신앙의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그 진리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우리들에게 영원한 삶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고자 하면 다른 것은 필요 없고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만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의는 오직 이 복음을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아들을 아주 엄히 교육시켰던 중세의 한 소작농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법조인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때도 법조인은 상당히 대접을 받는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사람으로 아주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그의 아들을 무섭게 훈련시켰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이미지는 늘 훈련시키고 무섭게 다루는 분이었습니다. 중세 가톨릭의 구원의 길에 대한 교리는 연단을 통해서, 어려운 고난을 통해서, 또 징계를 통해서 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훈련 중에 하나는 가톨릭 교회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자신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 계단을 올라가면서 무릎은 까지고 피가 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의 죄를 자책하고 참회하면 자기의 죄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그러한 훈련을 수도사로서 겪으면서도 결코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웠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통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진리를 깨닫고 그 순간 하늘에서부터 오는 진정한 평안을 얻었다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중세시대 한 수도사의 이 깨달음은 종교개혁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모든 교계를 지배하고 모든 세상을 지배하는 그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의 십자가 부활의 신학은 부패된 중세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율법적인 신앙과 면죄부 판매와 또 연옥을 믿는 교계에 루터는 정식으로 도전을 한 것입니다. 루터는 가톨릭 교계에 도전을 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진리를 전파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루터에게 중세시대의 최고 권력자인 교황으로부터 오는 핍박은 대단했습니다. 교황은 루터에게 화형으로 죽이라는 특별한 영장을 직접 발행했습니다. 독일과 유럽 전체를 다니면서 여러 가지 논쟁을 하면서도 그는 늘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교계에서 파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독일에 있는 프레드릭 대제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라는 성에 자신의 몸을 숨길 수가 있었습니다.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으면서 루터가 했던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을 처음으로 일반인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예배를 볼 때는 항상 라틴어로 예배를 봤습니다. 말하자면 백성을 무식하게 해서 무조건 복종하도록 하는 그러한 정책을 썼습니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대제들이나 신부들이 라틴어로 예배를 인도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성경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독일어로 된 그들이 읽을 수 있는 번역 성경은 상당히 개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그는 거기서 아주 유명한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을 지었습니다. 여러분들 그 찬송가 잘 아시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한영찬송가에는 384장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로마 교황으로부터 오는 핍박은 대단했고 그는 무서운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만 그는 주님께서는 나의 강한 성이기 때문에 내가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가 쓴 대로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옛 원수 마귀, 그의 간교한 모략, 그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강한 성이 되어주시고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확신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대적하리요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셔서 구원한 자, 또한 의롭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정죄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정죄는 우리의 내면적인 공격입니다. 비난, 송사, 그리고 여러 가지로 사탄은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자가 바로 하나님이신데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죄를 받고 또는 송사를 받고 또는 내적인 공격을 당할 때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시고 구원한 자라는 이 확신을 가지고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의롭다 하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정죄하리요. ▶그 다음에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실제적인 공격을 이야기합니다. 외적인 공격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의 근간을 흔드는 것 같은 핍박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환란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바울은 그의 확신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영어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we are more than conquerors. 넉넉히 이긴다 했습니다. 가까스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축구로 얘기하면 연장전에 가서 이기는 정도가 아니고 6:0 정도로 확실히 이기는 것을 말합니다. 완승이란 말이 있죠. 기독교인의 삶은 완승입니다. 여러분 삶에 어떠한 고난이 와도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완승할 것입니다. 6:0으로 이길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저는 이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바울이 나열한 것이 이렇게 많구나. 읽기도 힘들어요. 한 두 개가 아니에요.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많은 환란을 받았습니다. 바울도 우리같이 연약한 인간입니다. 바울이라고 이러한 어려움이 어렵지 않다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열거한 것 중에서는 power of devil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을 주는 power of devil,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이러한 두려움을 주는 scheme of devil도 나는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오고 원수의 공격이 오고 우리의 영혼을 흔들고 우리 삶의 뿌리를 흔들 것 같은 그러한 어려움이 올 때 우리를 공격하는 그 공격 자체보다 더욱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그 공격으로 인해서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더욱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강한 성이 되어주셔서 여러분을 승리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We shall overcome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We will be more than conquerors.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 요한복음 3장 16절 다 외우시죠? 성경이 다 없어져도 요한복음 3장 16절만 있으면 우리는 성경의 전체를 보는 거예요.

  ▶어느 선교사가 성경책을 가지고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가 도착하자마자 곧 성경책은 파손되고 그 선교사는 죽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성경책이 바닷물에 휩쓸려서 다 찢어졌는데 요한복음 3장 16절이 쓰인 종이만 그 섬에 도착했습니다. 이 선교는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섬 주민들 중에 요한복음 3장 16절의 구절을 읽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성경을 전부 요약하고 성경의 모든 내용을 함축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이야기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의 독생자를 희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내용은 상당히 간단하죠. 그렇지만 이 간단한 말씀 속에 우리들의 구원이 있고 이 간단한 말씀 속에 성경의 모든 핵심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우리의 삶의 구원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과 요한복음 3장 16장을 암송해보겠습니다.

  ▶어느 한 소년이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만큼 사랑하셨습니까? 주일학교 선생님은 두 팔을 양쪽으로 넓게 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만큼 사랑하셨단다. 그리고 이렇게 팔을 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왕의 왕으로 오신 크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희생하심으로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은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희생시킨데 있습니다. 어느 비행기의 추락사고가 있었습니다. 응급조치반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비행사와 그 안에 있는 승객들이 거의 다 재가루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조원들이 가까이 가서 보았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정말로 감격적이고 눈물어린 장면이었습니다. 타오르는 연기가운데 한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아기의 어머니가 온 몸으로 비행기의 충격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기를 보듬어 앉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기는 참상가운데 살아난 유일한 아기였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희생에는 아픔이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아픈 것입니다. 그 아픈 사랑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고통하실 때 함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 본인도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 중에 하나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엘로히 엘로히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고통과 아픈 희생을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픈 자에게 나음을 주시기 위한 것이고 구속의 생명을 주셨고 진정한 영혼의 평안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을 당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창에 허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시면서 구속의 완성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나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승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은 변치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고백을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함을 받았다. 구약에서 특별히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쓴 이 단어의 뜻은 변치 않는 사랑, 실패가 없는 사랑, 신실하고 영원한 사랑, God’s unfailing love라고 하는 뜻입니다. 광야를 지나서 홍해를 겪으면서 그들이 겪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하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실패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언제나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러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나는 허물이 많고 나에게 과오가 많고 언제나 완벽하지 않은데 하나님이 이러한 나를 끝까지 지켜주실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Unfailing Love입니다. 우리는 실패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패치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입니다. 내가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은 그날 까지 저가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함이라.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 ‘까지’라는 것은 나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아니면 나의 생명이 있을 때 주님께서 오신다면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은 한순간도 나를 놓지 않고 지켜주신다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어머니와 함께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어머니와 그 소년은 손을 꼭 잡고 서로 놓치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지만 가다가 힘이 없어서 어머니의 손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잃고 방황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손은 강한 손이라서 그 아들의 손은 꽉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목적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우리의 손이 약해서 하나님의 손을 꽉 잡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있죠. 시작하면 끝을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사람으로 선택하시고 구속하셨기 때문에 일생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손을 꼭 붙들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는 그가 감옥에서 많은 환란을 겪을 때 쓴 글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러분들 속에 성령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리스도께서 예수의 날까지 구원을 이루어 갈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로 우리를 어디서나 영원히 사랑하시며 지켜주실 것입니다.

  ▶자 이제 저는 렘넌트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원합니다. 렘넌트에 대한 말씀은 이사야서 6장 13절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 말씀의 역사적인 배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70년 혹 69년의 장기간 동안 국가를 잃고 노예로 끌려가던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둥지가 잘린 나무와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사야는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에 그루터기가 돼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하고 번성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우리 집 뒷마당에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남아있는 나무를 렘넌트라고 부릅니다. 나무가 잘릴 때 고통이 있습니다. 이렇게 잘릴 때 환란을 느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연녹색의 입이 그루터기에서 자랍니다. 그 다음엔 꽃이 나옵니다. 이것이 일년 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루터기에서 아주 예쁜 잎사귀가 솟아나고 아름다운 꽃이 난다면 열매도 맺을 것입니다.

  ▶렘넌트들에게 어려움이 있고 환란이 있을지라도 그 뿌리만 땅에 깊이 박고 있다면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외친 희망의 메시지처럼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남아만 있으면 됩니다.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인내하고 도전하고 끝까지 남아있는 자에게는 거룩한 씨가 이 땅에 그루터기가 돼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데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에 계시를 합니다. 그리고 자연을 통해서 계시합니다. 그리고 특수 계시를 합니다. 특수 계시는 성경말씀에 특히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입니다. 이런 것은 자연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루터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난입니다. 꽃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부활의 생명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절에서 44절까지 부활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연을 통해서 부활의 새 생명을, 그루터기에서 새 생명을 낸다는 진리를 하나님은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 밖에서 오는 환란을 스스로 이기기는 너무 어렵죠. 그러나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루터기의 역사인 것입니다.

  켈리포니아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세쿼이아라는 웅장한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는 둘레를 재기 위해 서너 사람이 필요하고 나무 꼭대기의 잎사귀까지 푸릅니다. 어떤 생물학자가 나무 꼭대기의 나뭇잎에 물 한 방울이 올라가는데 어느 정도의 힘이 필요한지 연구했습니다. 물을 나무 꼭대기까지 올리는데 말 12마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깊은 땅속에 내린 뿌리에서 물과 영양분을 강하게 흡수해서 나무 전체에 모두 운반합니다. 그것이 렘넌트의 힘인 것입니다.

  ▶그루터기는 별 볼일 없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 뿌리내린 뿌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내린 인내로 인해서 이러한 큰 힘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절망에 부딪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잠시 저의 선교 간증을 하겠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40년이 됩니다. 저와 저의 아내는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에 의거해서 세계선교의 명령을 받고 미국에 왔습니다. 1977년에 관악이라는 곳에서 청년선교를 했습니다. 제 아내는 미국 시카고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트리톤이라는 학교에서 복음사역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캠퍼스 선교를 하는 저희들을 보는 미국인들의 눈은 그렇게 반갑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한국은 상당히 후진국이었죠. 그리고 저희들은 얼굴이 노랬습니다. 그리고 영어도 제대로 잘 못합니다. 전도를 하면 쳐다봅니다. 저희들이 끈질기게 세계 선교의 사명을 붙들고 기도하는 가운데 1992년 미국 남 침례교회의 국내 선교부에서 군 선교 부부로 파송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미군부대에서 선교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39년 동안 저와 제 아내는 관악캠퍼스, 미국 트리톤 대학, 그리고 켈리포니아 다민족 교회 그리고 한인교회 5년 또 미군군목으로 영혼구원과 복음전파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남 침례교회의 선교부에 속해있습니다. 이제 다락방 교회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남 침례교 선교부에 속하면서 다락방 선교회와 협력사역을 할 계획에 있습니다. 저희는 연약했지만 저희의 보호자 되시고 강한 손이 되시고 선교사명을 감당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저의 사역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린 이유는 우리가 렘넌트 정신인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뿌리를 내리며,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도전하고, 그 확신 가운데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속에서 복음의 꽃을 피운다는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고 렘넌트로 택하시고 이제 끝까지 남아서 인내하고 도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가운데 승리하는 그러한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는 절망의 벽 뒤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38장에 보면 히스기야왕이 병에 걸려 죽음의 선고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히스기야의 절망과 통곡은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죽음의 선고를 받은 그에게는 아무것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왕이지만 어떠한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그의 절박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이사야 38장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심한 병으로 인한 죽음의 선고를 받습니다. 그 다음에 통곡으로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가 얼마나 애절했으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제비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절박한 순간이 있었습니까?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그 통곡의 벽을 영어로 cry wall 이라고 하지 않고 Wailing Wall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AD 70년경에 로마로부터 국가를 잃고 성벽이 다 무너지고 19세기동안 전 세계를 디아스포라로 떠돌아다니는 민족이 되고 1948년에 비로서 자신의 나라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보면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던 당시의 슬픔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통곡의 벽에서 지금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의 기도를 드립니다. 히스기야는 지금 그러한 기도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세 번째로 사건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나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들립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듣고 너의 눈물을 보았노라. 너의 생명을  15년 연장하노라.

  ▶절망의 벽이 앞에 있을지라도 그 뒤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눈물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건은 해가 뒤로 가는 사건입니다. 해 시계의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나는 사건으로 생명의 연장을 보여주는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모스의 제단이 비치는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징조로 이날은 해가 서쪽에서 떴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재조정하셨습니다. 원래 지구는 태양을 향해서 돌고 히스기야는 모든 환경의 지배를 받지만 하나님께서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이 순간 만물을 재조정하셨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절망의 순간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주를 재조정 하셔서라도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망의 벽에 부딪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기적이 우리의 삶에 나타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121편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는 어려움이 올 때 고개를 땅으로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고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불가능할지라도 가능케 하실 것입니다. 절망의 벽 뒤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들어주시고 희망을 주실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희망과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절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광명한 하늘이 보이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가 해 받을 것을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넉넉한 승리, 행복한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8장 38절을 여러분들과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크신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파고드는 영적인 시험, 또 외적인 시험, 이 모든 것에서 주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지켜주심으로 우리가 승리할 것을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렘넌트와 같이 이제 부활의 새 생명을 입고 하나님의 승리를 맛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이러한 삶을 바라보면서 승리자로서 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The end)